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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유교적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즐기던 허균

허균 허난성 기념관

술을 유교적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즐기던 허균

 

박정근 문학박사

(김수영 기념사업회 이사장, 황야문학 주간, 소설가, 극작가, 시인)

조선 중기의 천재 문인이자 파격적인 사상가였던 허균은 술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애주가였다. 허균은 술을 단순히 도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답답한 봉건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구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파격적인 음주 행위는 유교적 규범으로 구속하려는 편협한 보수적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 사회적 제스처로 볼 수 있다. 또한 술은 그에게 시인으로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허균의 술과 여자 문제가 조정에서 논란이 되자, 그의 스승이나 주변 지인들은 술을 줄이라고 충고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요구하는 순응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때 허균이 남긴 유명한 문장이 그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성인은 술을 마셔도 어지럽지 않으셨고, 공자도 술의 양을 정해두지 않으셨다. 내가 법도 밖에서 노니는 것은 내 마음의 자유일 뿐이다.”

술에 대한 허균의 파격적 자세는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유교적 예법에 얽매여 위선을 떠는 것보다 술을 마시며 솔직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에 훨씬 높은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허균 허난성 기념관

귀양지에서도 멈추지 않은 그의 술 사랑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허균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여러 차례 유배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유배지에 가면 자숙하기 마련이지만, 허균은 달랐다. 그곳에서도 허균의 술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한정록(閑情錄)은 유배 생활 중에 쓴 책으로 애주가들에게 자주 회자된다. 그는 은거하는 선비의 즐거움 중 하나로 ‘술’을 첫째로 손꼽았다. 그는 여기서 음주 행위의 품격을 논하고 있다.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그의 관점에서 두주불사형의 술자리는 격이 떨어진다. 술을 함께 마시는 사람과 술을 마시는 장소는 술자리의 격을 맞춤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즉, 좋은 경치와 좋은 사람이 곁들여진 술자리에서 마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좋은 술의 유무가 은거의 질을 결정하는 술에 대한 철학을 지녔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허균은 갖추어야 할 소양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음식 사전에 기록된 술 이야기인『도문대작(屠門大嚼)』을 살펴보면 그는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이 책은 유배지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며 쓴 한국 최초의 식경(食經)이다. 『도문대작』에는 전국의 유명한 술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서울 소주가 맑고 독하며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평양 감홍로(甘紅露)는 붉고 향이 달콤한 명주이다. 안동소주는 지역의 특산품으로 일찍부터 발달하여 가문마다 독특한 차이가 있고 그 맛이 뛰어나다는 정평이 났다. 허균은 전국의 술맛을 꿰고 있을 정도로 주류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술로 인해 탈이 난 사람으로서 허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술 때문에 파직된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는 술을 사랑한 까닭에 술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파괴하는 과감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는 광해군 시절에 “부모의 제사보다 술이 더 중요하다”라고 발언한다. 조선 사회는 충효에 관해서 반기를 들거나 어기면 사회적으로 문책받는 분위기였다. 특히 부모에 대한 제사는 자식으로서 절대적인 의무사항이다. 그런데 허균은 제사보다 술이 더 중요하다는 반사회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국가의 기초적 가치인 충효에 반기를 드는 사고의 소유자로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의 발언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사회적 금기 사항인 부모의 제사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을 감추지 않는다. 그 당시 반사회성을 보인 또 다른 발언은 “불교를 믿고 술을 마신다”는 풍문이었다. 이런 술에 관련한 반사회적 발언으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자주 받았다.

 

허균

허균의 반사회적 행위로서 회자되는 또 다른 문제는 술을 마시며 기생과 어울렸다는 비판이었다. 한번은 관직에 있을 때 술을 마시고 기생들과 어울려 풍악을 울렸다는 이유로 “사대부의 체통을 더럽혔다”며 파직되었다. 황해도사 부임 시 서울에서 데려온 기생과 함께 살았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특히 관직에 재임하면서 기생을 끌어들인 사실은 관아를 사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유사한 이유로 삼척 부사로 부임한 지 13일 만에 또다시 파직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렇듯 허균은 술과 함께 기생 문제로 반복적인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규범이 그의 선천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살아가는 동안 사회가 요구하는 마스크를 쓰고 사는 것을 수용하는 순응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생을 한번 살다 가는데 남의 눈치나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내 본성이 원래 이러하니 어쩌겠느냐?”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허균의 본성 주의적 자세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유교적 규범을 내세워 자신들의 고결함을 재현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칫 이중적 가식이 될 수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음주와 기생 교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당시 사회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와 충돌하며 지속적인 논란과 징계를 불러일으켰다.

 

허균에게 술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성리학의 도그마에 묶인 조선 사회는 심리적인 감옥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이 감옥에서의 탈출 방법은 초월이나 망각이었다. 우선 초월을 통해서 썩어빠진 현실을 뛰어넘는 도교적 이상을 추구하려고 했다. 홍길동이 신분 차별과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조선을 떠나 먼 이상 국가로 여겨지는 섬으로 떠났듯이 현실 세계를 떠나 무욕의 도교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술을 마시는 행위는 주선이 되어 속세의 오염을 씻어내어 정결하게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 그는 마치 제의를 행하듯 “한 잔 술에 시 한 수를 읊으니, 세상의 시비가 모두 뜬구름 같구나”라고 되뇌인다.

홍길동전

또 다른 탈출구는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적 현실을 술을 마시고 잊어버리는 것일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모순의 현실을 마냥 대면하고 살 수는 없다. 견딜 수 없을 때는 가끔 망각하는 것도 생존의 전략이다. 어쩌면 더러운 현실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의 불길로 타오를 수도 있었으리라. 허균은 술을 통해 당대의 엄격한 신분제와 성리학적 질서에 저항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에게 술은 인생이라는 비극을 견디게 해준 가장 따뜻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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