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이여, 삶을 노래하고 즐겨라

박정근 칼럼

술꾼들이여, 삶을 노래하고 즐겨라

박정근 교수

 

희랍인들은 디오니소스를 왜 사랑하고 경배했을까. 우리는 흔히 술에 취해 흥청망청 즐기는 주신제 참여자들을 매우 희극적으로 바라본다. 현대인들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마스크를 쓰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그림자처럼 살아간다.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지 못하는 인간은 껍데기 같은 사회적 자아를 본래적 자아인양 위장하지만 여전히 허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삶의 활력을 회복하려면 희랍시대의 디오니소스의 경배자들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희랍인들은 디오니소스를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포도나무와 연관시켰다. 그들은 나무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헌신하고 경배하였다. 희랍인들은 디오니소스를 “나무에 있는 신”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수염이 달린 가면으로 머리를 나타내고 잎이 무성한 가지를 옆으로 돌출시키곤 했다.

그렇다면 희랍인들이 왜 디오니소스를 그토록 숭상하고 경배한 것일까. 현상학적 관점에서 그들이 디오니소스를 풍요를 약속하는 나무를 잘 자라게 하는 후원자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과일 재배자들은 과수원 나무 앞에 나무줄기 모양의 초상화를 세워놓았다. 디오니소스가 술을 빚을 수 있는 포도, 사과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발견한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희랍인들이 디오니소스를 경배한 실질적인 이유는 그 신이 그들의 풍요를 후원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술을 만들어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희랍인들이 풍요를 약속하고 술을 통해 도취감을 가능하게 해준 디오니소스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성과 열정의 길항적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질서와 이성을 내세웠던 제우스적 풍조가 만연했던 희랍사회에서 열정과 도취의 문화는 자연적으로 경원시되었을 것이다. 신화적으로도 제우스-아폴론-아테네 신들이 중심부에 있다면 디오니소스-데메테르-포세이돈은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인간사회가 이성과 질서만을 내세워 열정과 욕망을 억압한다고 인간의 불균형성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폭발적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디오니소스의 정체성은 문화와 야만의 경계선에서 자연의 경작과 개척의 영웅으로 ‘사냥꾼으로서의 디오니소스’에서 적확하게 드러난다. 크레타에서 사자 두 마리를 맨 손으로 꽉 잡고 있는 디오니소스의 모습은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자의 표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즘 생식은 야만적인 행위로 비난받을 수 있지만 신의 생명력이 들어있는 동물을 찢어먹은 행위는 신의 생명력을 자기화하려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의 생식행위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 존재하는 동물성을 회복하는 심리적 치유효과가 있으니라.

디오니소스의 신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에 대한 그림을 참조해보면 어린 소년이 들고 있는 디오니소스의 무서운 가면이 여인을 놀라게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점잖은 실레누스는 술이 담긴 성배를 들고 있는데 매우 위협적으로 보인다. 술은 제의에서 사용되는데 이성적 의식을 변화시켜 환상이나 황홀경으로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좀 이상하고 무섭게 생긴 남성들은 곧 입장할 신의 접근을 준비하면서 입교자를 맞는다. 디오니소스는 제의의 중심인물로 고양된 자세로 권좌에 앉아있는 여신이자 연인인 아리아드네를 황홀하게 포옹하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편안한 자세로 여신의 가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부드러운 육체가 그녀 쪽으로 향한 채 완전하게 이완되어 있다. 그는 껴안긴 채 열정에 사로잡힌 여신의 옆에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음 이미지는 반나체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있는 입교자를 보여준다. 그녀의 자줏빛 의상이 허리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그녀는 광주리에서 뚜껑을 들어 올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한다. 그 안에는 아기 디오니소스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왼손을 들어 올린 채 회초리를 들고 있는 천사가 그녀의 동작을 멈추게 한다. 그녀의 표정으로 상상해보면 그녀는 아주 신비로운 장경을 충분히 목격한 것 같다. 이제 신적 체험을 끝낸 그녀가 세속으로 돌아갈 차례이다. 그녀가 가운데 방에서 경험한 친밀함과 황홀경은 육신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으리라.

이 그림에는 또한 두 명의 여사제가 등장하고 있다. 한 쪽은 옷을 입었지만 다른 쪽은 매혹적인 나체를 보여준다. 그들은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일어난 심리적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강력하고 시적으로 환호하며 춤을 춘다. 일단 한번 황홀경을 경험하면 디오니소스 제의 참여자들은 신비적 체험을 몸과 마음속에 각인하고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들은 영원히 광적인 신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술꾼들은 현대판 디오니소스 신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결코 패배나 절망에 빠져 후줄근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을 되살림으로써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본래적 자아를 재발견하고 황홀함을 표출하는 경건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필지:박정근 교수

(대진대 영문과 교수, 윌더니스문학 주간, 소설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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