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종종 한 나라를 상징하는 기호로 활용된다.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와인, 독일의 맥주, 러시아의 보드카, 중국의 마오타이, 일본의 청주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럼 한국은 무얼까? 아직 국민적인 합의에 도달한 술은 없지만, 근자에 막걸리 소비량이 늘면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막걸리를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동아시아 3국,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전통에 뿌리를 둔 술이 있지만, 현재는 맥주에 취해 있다고 봐야 한다. 인구가 많은 중국은 독일을 제치고 세계 최대 맥주 생산국이자 소비국이 되었고, 일본은 맥주와 맥주 타입 발포주의 소비량이 전체 술 소비량의 70%에 이르고, 한국 또한 전체 술 소비량의 55%가 넘는 양을 맥주가 차지하고 있다. 동아시아 3국이 유럽 자본주의 문명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맥주 소비량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동아시아 3국이 맥주 거품으로 뒤덮여 있지만, 동아시아 3국 술의 공통된 특성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동아시아 3국을 대표하는 술들은 누룩을 사용하여 빚고 있다.
중국의 마오타이는 백주(白酒)의 일종이다. 백주는 고량(수수), 쌀, 밀, 옥수수 등에 포함된 전분을 누룩으로 당화하여 발효시키고, 이를 증류하여 만든다. 백주를 발효시킬 때 사용하는 누룩은 곡물을 분쇄하여 물로 반죽하여 단단하게 성형하여 곰팡이를 증식시켜 만든다. 이는 한국의 전통 막걸리를 빚을 때 사용하는 누룩과 동일한 제조법이다. 다만 중국의 누룩은 블록 벽돌처럼 크고, 한국의 누룩은 원반이나 사각 형태로 그 크기가 작다. 일본 청주를 빚을 때 사용되는 누룩은 쌀 고두밥을 찌고 거기에 황국균(黃麴菌)을 파종 배양하여 만든다. 한국과 중국은 단단하게 뭉친 떡누룩이라면, 일본은 쌀알이 흩어진 상태의 흩임누룩으로 그 형상이 다르다.
반면에 유럽의 술은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다. 포도로 만드는 와인은 효모만 필요할 뿐이다. 포도는 당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당화효소가 들어있는 누룩이 필요하지 않다. 맥주나 위스키는 주 재료가 보리(大麥)와 밀(小麥)이다. 보리와 밀에 수분과 공기를 접촉시켜 싹을 틔우고 나서 건조시켜 어린뿌리를 제거한 맥아(麥芽)를 원료로 사용한다. 싹 튼 보리나 밀은 효소가 활성화되어 전분이나 단백질을 분해하기 쉬운 상태가 되어 있다. 이 맥아를 물에 넣어 끓여서 맥즙을 만들고 여기에 효모를 넣어서 맥주를 만들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은 보리나 밀을 싹 틔운 맥아(Malt)로 맥주와 위스키를 만들었다면, 누룩 문화권은 보리를 싹틔운 엿기름으로 단 음료, 식혜를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추적하다보면 유럽과 동아시아의 차이, 곡물을 활용하는 법, 기후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삶과 문명의 차이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동아시아에는 곰팡이를 배양한 누룩이라는 특별한 발효제가 있어서, 맥아를 사용한 알코올 발효음료를 일찍이 포기했거나 채택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리하자면, 동아시아 3국이 누룩 문화권이라면, 맥주와 위스키를 만드는 유럽은 맥아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의 큰 차이는 누룩에는 곰팡이가 들어 있고, 맥아에는 곰팡이가 없다는 점이다. 즉 동아시아 3국 술의 정체성은 누룩 속에 곰팡이를 키워서, 술을 빚는 데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아시아 3국의 술이 동일한 길을 갔던 것은 아니다. 누룩을 활용하는 방법이 달랐다. 중국은 밀이나 보리 따위의 곡물로 만든 누룩에 찐 수수 따위를 수분을 적게 넣고 섞어 반고체 상태로 발효시키고, 이를 증류한 소주 형태로 즐겨마셨다. 일본은 쌀로 만든 누룩에 쌀 고두밥을 넣어 향은 풍부하되 맛은 간결한 청주를 만들어 즐겼다. 한국은 단단하게 뭉친 밀누룩을 만들어 쌀이나 보리를 물과 함께 섞어 발효시킨 뒤에 걸러 마셨다. 형태로 보자면 대륙인 중국과 반도인 한국은 뭉친 누룩으로 정리되었고, 섬나라인 일본은 바슬바슬 흩어진 누룩으로 정리되었다. 19세기이후에 개방과 침탈의 역사 속에, 문화와 기술 교류가 이어지면서, 그 중간 지대인 한국에 민간에서는 전통적인 뭉친 누룩이 여전하고, 공장식 제조장에서 선별한 종균을 이용한 흩임 누룩이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동아시아 삼국끼리도 서로 누룩의 형태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의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도수 낮은 막걸리를 즐겨 마실 수 있었던 동력은 맛이 풍부한 누룩의 힘을 빌렸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는 도수 낮은 맥주가 강렬한 맛과 향을 지닌 홉의 힘을 빌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과 흡사하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소비한 술이 막걸리였다. 2009년부터 막걸리가 새로 주목받으면서 2011년 말에는 막걸리 생산량이 전체 술 생산량의 10% 정도로 증가되는 변화가 있었다. 이는 한국 민족이 외국술(맥주, 위스키, 와인, 일본청주 등)을 개방하고 수입한 뒤로 처음으로 자신의 술에 다시 주목한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막걸리의 고유한 맛 속에는 감칠맛 나는 누룩 맛이 들어있고, 이에 재주목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막걸리를 제조할 때 전통 방식은 뭉친 누룩만을 사용하였는데, 현재의 막걸리 양조장에서는 흩임누룩을 발효제로, 뭉친 누룩은 맛을 내는 첨가제로 사용하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큰 틀 안에서는 누룩의 맛과 향이 지배하는 술이 한국은 막걸리이고 일본은 청주라고 할 수 있다.
누룩의 형태가 나라마다 지역마다 특화되긴 했지만, 그 출발은 중국 대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누룩을 잘 정리해놓은 신뢰할 만한 중국 고문헌은 후위(後魏)의 사람 가사협(賈思勰)이 530~550년 경에 편찬한 <제민요술>이다. <제민요술>에는 보리를 찐 것, 볶은 것, 날 것을 혼합하여 만든 누룩도 등장한다. 유럽에 존재하지 않는 보리 활용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제민요술>에는 좋은 누룩을 만들어 달라는 축국문(祝麴文)이 실려 있다. “…원컨대 신력을 내리셔서 원하는 것을 두루 살피소서. 벌레들은 자취를 없애고 쓸데없는 벌레들은 흔적도 없이 하소서. 솟아나는 곰팡이의 모습은 비단과도 같이 촘촘하게 빛나며 그 열기는 타오르는 불같이 세차게 사나우며 향기는 후추 향기보다 드높고 맛은 오미의 화정(和鼎)보다 더 하며 마시면 군자에게도 취하게도 깨게도 하며 소인에게는 공손해지게도 조용해지게도 하도록 몇 번이고 삼가 여쭙니다….”
누룩을 잘 만들어야 좋은 술이 되기 때문에, 술 빚는 이들은 누룩에 가장 큰 정성을 들인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누룩이 있어야 차별화된 술을 만들 수 있다. 쌀이나 물은 공동의 자산이라 자기만의 술, 유일한 술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런데 누룩을 직접 만들면 자기만의 술에 도달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이 누룩 속에서 동아시아 3국 술의 정체성도 담겨있다. 동아시아 3국은 누룩문화권을 형성했고, 곰팡이를 활용한 자기식의 누룩을 정착시키면서 다른 대륙과 다른 나라의 술들과 차별화된 맛을 추구할 수 있었다. 글․사진 / 허시명(막걸리학교 교장, 술평론가)
사진설명
1 단단하게 뭉쳐서 만든 한국 전통 누룩
2 누룩을 사용하기 좋게 빻아서 항아리에 담아두었다.
3 막걸리양조장이나 일본 청주양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쌀로 만든 흘임누룩
4 막걸리 양조장의 누룩방, 이곳에서 흩임누룩을 만든다.
5 자가제조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효모를 뿌리고 있다.
6 효모의 활성화를 돕기 위해서 공기가 많이 섞이도록 술을 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