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患者列車
▴2020년 벽두부터, 중국 우한(武漢)에서부터 비롯된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 국내에 연기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부의 미지근한 대처에 불안감이 가중된 대한민국. 서울의 수도권을 달리는 전철 칸은 환자를 싣고 달리는 열차처럼 변해버렸다. 승객의 90% 이상이 마스크를 쓴 채 객석에 헐렁하게 앉아있는 황량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에즈볼라, 메르스, 조류독감, 돼지열병에 이어 중세의 페스트처럼 공포감을 확산시키는 바이러스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연이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아 자연스럽게(?) 인종청소를 시작한 것일까. 인간이 정치적 이유로 인간 청소를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아차! 실수로 연구실에서 관리하던 판도라의 상자를 떨어뜨려 번진 것일까. 나아가 이 모든 것들 까지도 진화과정 중 발생하도록 창조주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지구별에 붙어사는 생명체 인간이, 문명의 이름으로 지구를 파괴하고 동족을 살해하고 행성의 원초적 자원까지 파헤치고 빨아내더니, 결국엔 인간 자신의 생명력을 들쑤셔 헤집는 자해(自害) 과정까지 와버린 것일까. 인류의 미래는 결국 이렇게 끝나게 돼 있는 것인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군부대의 이동병원(移動病院)이 떠오른다. 후방에 있어야 할 병원이, 전쟁이 터지면 전투부대를 따라 최전방의 포성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진출한다. 전상(戰傷)을 당한 군인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하여 의약품과 의료기구를 싸들고 전선에 배치되기에 야전병원(野戰病院)이라고도 한다. 이곳의 의사와 간호사는 의료인이면서도 군인 신분이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온 병사들의 생사여부를 신속하게 판단하고, 팔 다리를 절단하는 외과수술은 기본에 속할 정도로 잘 훈련된 전문의와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다. 총성과 포탄 터지는 소리를 밀쳐내듯 울부짖는 병사들의 신음을 달래며 백색 가운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여군(女軍) 간호사는 전쟁터의 꽃이 되고 천사가 되고 구원의 여신 같은 존재가 된다. 전후방 구별이 없는 바이러스의 침공! 지금 수도권 전철에 간호사라도 배치해야 되는 것 아닐까. 행정서비스 차원에서.
▴카사블랑카는 아프리카 대륙 서북단 끝에 있는 모로코의 항구도시 이름이다. 유럽 남단의 이베리아 반도와 지브로올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근거리 위치해 있어 고대부터 패권 쟁탈의 분수령이 되곤 했던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2차 대전 중 연합국과 나치의 대결구도 하에 모로코는 중립국을 자처하며 살아남기 위하여 굴욕을 견뎌내고 있는데, 참! 딱한 처지에서 강대국의 비위를 맞춰가며 생존을 구걸한 이 나라의 그 유명한 도시 이름을 딴 영화 ‘카사블랑카’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명화(名畵)로 자리매김 한다. 명화가 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잘 어우러져야 하겠지만,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영화 ‘카사블랑카’는 등장인물을 통해 한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보여줄 수 있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담담하게 그려내는데, 결말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와 바람직한 미래의 인간세상을 선택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귀결시킨다. 인간의 기본적이고 당연해야 할 권리를 마치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의 조건’으로 부각시킨다.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살까. 기껏 살아봤자 1백년 정도인데, 적당히 살만큼 살았으면 됐지 애걸복걸 끌탕을 할까. 얼어 터진 지구별을 쉼 없이 달리는 설국열차(雪國列車)라는 영화가 있다. 애초에는 외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였는데, 한국인 감독이 각색해서 또 만들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단지 히트작이니까 베껴먹듯이 찍은 영화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과 종교관이 날카롭게 표출되어 있어 긴장감이 돈다. 상징적 주제는 ‘인류가 고대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 생존방식이 ‘하늘의 별자리’였음을 그려낸다. 빙하기, 홍수, 더위, 추위 등 온갖 자연재해를 이겨내기 위한 인간의 지혜가 인간끼리의 패권다툼이라는 권력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결국 좀비영화의 엑스트라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어서《설국(雪國)》이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연상된다. 일본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대표작인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상황을 친근하게 그려낸 연작 소설이다. 작품의 무대는 눈이 많이 오는 지방(雪國)을 잡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은 평범한 보통사람들이지만 자신만의 세계, 개인의 생활리듬에 따라 일상이 전개되어 가는 것을 그야말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소설《설국》은 소설을 읽히게 만드는 특별한(?) 요소는 없다. 그저 담담한 게 특징이다. 바로! 이 점이 인간 행복의 조건이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이유이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평범하게 살면 안 될 이유이라도 있단 말인가. 권력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 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