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자긍심 槿域江山

권녕하 칼럼

마지막 남은 자긍심 槿域江山

 

필자는 대한민국 영토를 ‘지리적 용어’로 지칭할 때 ‘근역강산(槿域江山)’이라고 한다. 또한 ‘한강’은 한글 사용을 원칙으로 삼지만, 한자로 꼭 써야할 경우에는 ‘한(漢)강’이 아닌, ‘한강(韓江)’으로 쓴다. 까닭은 ‘역사전통문화예술’ 뿐만 아니라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깨닫고 갖추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근역강산은 겨레의 삶터이기에 가슴과 머리에 담아 소중하게 지키고 여기며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 이 정신을 사랑하고 계승해 나가자는 것! 그나마 남은 근역강산 마저 잃을 수는 없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역사, 전통, 문화예술은 겨레의 자긍심이기 때문이다. 이 자긍심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문화예술은 물론이요 역사와 전통을 이어갈 그릇, 바탕이 되어줄 국가도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국가를 유지해 온 일에, 겨레는 죽음도 불사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이끌어 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3.1운동을 일으키고 상해임시정부를 세우고 동토에서 독립군으로 죽어 묘비조차 없이 스러져 갔다. 1945년에 선물처럼 받은 광복 또는 해방이 1950년에 돌연! 6.25 동란이 일어난다. 외적(外賊)을 무찌르고 왜적(倭賊)을 막기 위한 전쟁이 아닌, 동족상잔의 불법남침이 일어난 것이다.

이 싸움의 양태가 참! 기가 막히도록 한심하다. 경평축구단 경기하듯, 대보름날 돌팔매질 하듯 동족끼리 치고받는 정도를 넘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등 그간 쌓이고 싸여왔던 인류의 모든 병폐가 한꺼번에 폭발한다. 이렇듯 양대 세력의 지원을 각각 받은 남북한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무지막지한 파괴전이 이 땅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무력통일을 목표로 한 북한의 불법남침이었기에 근역강산이 피바다로 변하고 말았는데, 그나마도 38선을 경계로 팽팽한 세력균형을 이루며 동서냉전 동안 휴전이니 정전이니 말잔치로 시간을 끌어오다, 결국 북한의 핵개발로 균형이 깨지자, 남한은 원하든 말든 전력 불균형 상태로 내몰려 딱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이 상황을 목도한 주변국은 신바람이 나기 시작한다. 국제법은 힘 있는 자의 손익계산서(損益計算書), 인권은 박애주의를 가장한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 환경보호와 에너지 확보는 패권유지를 위한 정산표(精算表), 한 마디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꼭 맞는 말로 증명되고 말았다.

서인세력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光海君)을 끌어내리고 인조(仁祖,16대)를 옹립한다. 이유는 명나라와 후금(이후 청나라)과의 사이에서 국정운영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왕권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말로 탄핵을 당한 것이다. 구체적 이유로는 명나라를 잘 섬겨야 된다는 대의명분을 외면하여 국정을 망쳤다는 것이 사실상 그 이유의 전부인 것처럼 돼 있지만, 진실은 서인세력들의 권력탈취였다. 내부 쿠데타! 그렇다. 서인 세력은 이괄(李适)이 이끄는 군사를 앞세워 조선의 정권을 검어 쥔 다음 논공행상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괄의 아들이 모함을 받자, 이괄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판단,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쳐내려와 경복궁을 점령하고 두 번째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인조는 궁궐을 버리고 이미 남쪽으로 도망질을 친 다음이다. 이후 이괄의 군사를 평정한 서인들이 옹립한 인조의 왕권이 회복된다. 그러나 이괄이 쉽게 쳐내려왔듯이 이후 후금(청국)도 이 길을 따라 손쉽게 쳐내려와 조선이 사실상 망하고 만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굴복하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조선을 징계하기 위하여,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킨 후금(청국)이 5일 만에 한양 도성을 함락시킨다.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던 인조는 결국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삼전도에서 바치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만다. 이후부터,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유지돼왔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의 과정과 흐름이 사뭇 신비(神秘)할 정도이다. 단, 다음과 같은 집단이라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조선의 학문권력자 세력 즉 통치세력이 첫째, 비겁하고 눈치 빠른 간신들의 집단일 경우, 둘째, 힘 있는 자를 만나면 천부적으로 아부 잘하며 배반을 식은 죽 먹듯 하는 는 집단일 경우, 셋째, 나라보다는 일신상의 안위가 우선일 경우, 넷째, 학문과 철학을 오로지 출세와 지배수단으로 삼는 집단일 경우, 다섯째, 민중은 죽거나 말거나 세상이 지옥이 되거나 말거나 특권층의 삶을 당연시하는 집단일 경우, 여섯째, 강화도에서 후금 군(軍)이 압박해오자 어머니와 아내와 딸을 바치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김경징 같은 무리의 경우이다.

21세기에, 또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자긍심, 근역강산(槿域江山)을 다시 맡겨야 한다니!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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