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玄酒)를 아십니까?

지금은 지천에 술이 흔하다. 산골짜기 구멍가게에서 생수 사기보다 술 사기가 쉬운 시대다. 그러나 옛날에는 술이 없어서 제사 때 물을 떠놓고 지냈다. 때문에 이 물을 ‘현주(玄酒)’라 불렀는데, 이는 밤에 물빛이 검게 보이기 때문이다.
술은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습성화된 음식 중 하나이지만 크고 작은 의식을 거행할 때 필수적인 예물로 사용했다. 특히 제사에서는 술을 중요시 했는데,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술을 마시지 않았어도 따라 올렸다.
이처럼 제사나 잔치에 술이 없으면 안 될 만큼 귀하게 여긴 것은 《예기(禮記)》에 ‘술로 예를 이룬다(酒以成禮)’고 했고, 《한서(漢書)》에는 ‘술은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선물이니 온갖 의례모임은 술이 아니면 행하지 못한다’라고 엄숙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술이 지성의 상징이었으므로 제사 때 필수품이긴 했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물로 대신했다. 그 대신 ‘맑은 물’을 올릴 때에는 ‘물’이라 하지 않고 ‘무술(淸水)’ 또는 현주라 불렀다. 현주는 알코올 성분이 없는 의미상의 술일뿐이다. 옛날 중국 황실에서 황제가 연회를 베풀 때에는 현주 즉, 물부터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황제 앞에서 술에 취해 실수하지 않도록 술 깸을 미리부터 다짐하는 것이고, 술의 근원이 물임을 일깨우는 뜻이라고 한다.
흔히 ‘술맛은 물맛’이라고 한다. 물맛에 따라 술맛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유명 전통 주가(酒家)의 맥을 이어오는 곳은 그야말로 물맛이 일품인 곳이 많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막걸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전국 700여 양조장에서 빚어지고 있는 막걸리 맛의 결정은 물맛이다.
과거 중국의 상류사회에서는 주연(酒宴)을 베풀 때 반드시 냉수부터 마셨다고 한다. 만약 주인이 손님에게 먼저 냉수 한 잔을 권하지 않으면 그것은 큰 모욕을 주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야인(野人·우리말로 상것, 또는 오랑캐)에겐 술부터 권했다니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이 같은 술 문화를 받아들이자고 한다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게 분명하다. 현재 우리의 술 문화는 독한 술로 한 순배 돌려야 제대로 된 술자리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술 문화를 한 번 생각해보자. 삼겹살에 소주로 시작한 술자리가 어느 정도 얼큰해지면 입가심이란 명목을 달아 호프집으로 향한다. 그러다 발동이 걸리면 단란주점 같은 곳으로 계속 발길이 이어진다.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주행(酒行) 코스다. 어디 그 뿐인가. 어느 주당은 출근해서 “어젠 막걸리에 소주, 그리고 맥주에 양주까지 짬뽕했더니 죽겠어”라며 죽지 않고 출근한 게 다행이라고 떠벌린다.
영국의 문호 사무엘 존슨은 “지금까지 인간이 궁리해낸 것 중에서 가장 큰 행복을 만든 것은 바로 술”이라 했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 이백(李白)은 《술 기다리며》란 시에서 ‘술병을 청실 매어 갔거늘/ 술사오기 왜 이리 더디뇨./ 산꽃은 날 향해 웃음 짓고/ 더 없이 술 들기 좋은 땔세./ 느즉이 동창 아래 술잔 드니/ 꾀꼬리 날아 다시 와서 우네./ 봄바람과 취한 사람/ 오늘따라 사이좋네.’라고 읊었다.
술은 옛 성인(聖人)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술 한 잔 마시더라도 풍류와 멋스러움을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행복의 근원인 술을 하인 다루듯 하지 말고 좀 더 우아하게 대접해야 평생 친구로 사귀며 동고동락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주를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이다.
술은 비록 냉수(현주)가 아니더라도 약한 술로 시작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덜 마시게 된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 안주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또 술이 막걸리가 됐든 소주든 간간히 현주(玄酒) 즉, 물을 자주 마시는 것이 최상의 보약이다. 성현들이 괜히 물을 마셨겠는가.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