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잠들어 향이 닫혀있는 현상
한관규 원장 (와인마케팅경영연구원)
레드 와인이 영 할 때에서 성숙 단계로 전환하면서, 와인이 잠들어 향이 닫혀있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덤 와인(Dumb wine)’ 또는 ‘덤 페이즈(dumb phase)’라 부르며 와인에 따라 시기가 다르게 진행된다. 이때 일반적으로 ‘와인이 닫혀있다(closed)’ 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레드 와인에서 이 현상은 영 할 때에서 성숙 단계로의 전환기이다.
와인은 병입 한 직후, 풍부하고 잘 익은 향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일정 기간 후에 와인은 복합적인 향이 나타나는 숙성이 완전히 되기 전에 과일 맛과 향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이 기간 동안 와인은 단순히 맛이 좋지 않으며, 이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다양하지만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 이 벙어리 단계의 시간 프레임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와인 애호가는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덤 페이즈(dumb phase) 현상
와인은 품종에 따라 향미가 다양하고 기후나 지역에 따라 특성을 나타내는 등 좋은 점이 많지만 살아 숨 쉬는 음료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발효가 끝나는 순간부터 와인은 변하기 시작하여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 중 레드 와인의 경우, 심각한 변화는 “와인이 잠들어 버리는” 덤 페이즈(dumb phase)이다. 즉 풍부한 과일 향의 육감적이고 화려하던 와인이 굳게 닫히고 갑자기 아로마가 사라지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와인 시음 자는 테이스팅 감각을 의심하며 실망하게 되고, 고가로 산 와인일 때는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덤 페이즈의 대표적 예로서 고객 디너를 주최하던 자리였는데, 제공된 20년이 넘은 보르도 1등급 와인, 샤또 라피트(Chateau Lafite)는 벨벳같이 부드럽고 풍부하고 미묘한 과일 향에 피니시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와인이었다.
그러나 이날 동일한 와인을 오픈했는데 향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야겠지 생각하고 기다렸으나, 그대로였고 디켄터를 사용했을 때도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으나 지난번의 화려함은 아예 느낄 수 없었다.
◇ 아로마 향의 변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직도 정확히 설명할 방법은 없다. 와인의 향은 일반적으로 1차 포도 품종의 향을 아로마라고 하고 숙성된 와인의 복합적인 향은 부케라고 한다. 1차 아로마는 사과나 커런트, 그레이프 프루트 같은 신선한 과일 향이다.
2차 향은 1차 아로마에 발효 향이나 젖산 발효의 버터 향, 샴페인의 이스트 숙성 향 같은 향이 더해진다. 마지막이 신비스러운 제3의 영역인 병 숙성 향으로 송로 버섯에서 삼나무, 연필심, 동물 향까지 영역이 넓다. 이렇게 생성되는 일련의 와인 향이 병 숙성 중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1차향에서 3차향까지 향이 변하는 과정 중, 어느 지점에서 와인을 마시게 되는데, 그때 병속의 와인 상태를 알 수 없으니 희비가 교차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인 수송과 저장의 영향에 따른 변화
와인을 병입한 후 생기는 보틀 쇼크(bottle shock) 또는 시크니스(sickness)는 외부 산소를 흡수한 병속의 와인이 평형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쉬는 조정기간이다.
이러한 현상은 와인 병입 중 와해된 페놀 화합물(주로 타닌과 색깔)의 영향으로 병입 중 짓눌리고 뭉크러져 연결고리가 끊어진 페놀 화합물이 정상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와인 수송 또는 저장 과정 중에 생기는 흔들림이나 온도의 변화 등도 향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명품 와인도 한동안 무덤덤한 상태가 계속 되었는데, 코르크의 질이나 온도 등도 원인이 되지만 같은 와인이라도 병마다 다를 수 있고 진행 과정도 다르므로 누구도 그 기간을 예측할 수는 없다고 여기도 있다.
◇포도밭 떼루아의 영향에 따른 변화
이런 와인 변화 과정은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밭 떼루아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떼루아는 포도밭의 특징 지워주는 자연적 요소의 포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그 포도원의 토양과 자연환경, 토질구조, 방향, 위치 등의 지정학적인 조건뿐 아니라 미세기후대 등 기후환경을 통틀어 “떼루아(Terroir)”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최적의 기후에서 재배된 포도로 생산된 고급 와인은 산도가 많고, 탄닌이 강하며 바디감이 있어 숙성이 느려 천천히 ‘덤 페이즈’가 진행되며, 반면에 더운 날씨가 계속된 빈티지에 완숙된 포도로 만든 와인은 ‘덤 페이즈’가 빨리 온다고 한다.
◇와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
와인이 언제까지 잠자고 있을지는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동일한 와인을 예전에 마셨을 때는 너무 좋았는데 그 후 수년간은 꼭 닫혀 있는 경우가 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마셨을 때는 정말 훌륭한 와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럼 이러한 현상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은 박스로 와인을 사서 한 병씩 차례로 마셔보며 변화 과정을 체크해 볼 수밖에 없다.
병 속의 와인은 제 나름대로 변화의 여정을 떠나는데 이 과정을 알아 챌 수 있는 방법은 소비자로서는 경험 밖에 없다. 그리고 와인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 더욱 생기 있고 복합적인 향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는 것도 경험만으로 알 수 있다.
◇ ‘덤 페이즈’ 현상 대처 방법
와인 소비자로서 ‘덤 페이즈’로 인한 와인의 닫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면 좋을까? 고민하게 된다. 또한 왜 어떤 와인이 중년에 위기를 맞고 디켄팅을 해도 숨 쉬지 않는 것일까? 라는 문제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보편적으로 4년~8년 사이에 수평적 테이스팅을 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와인은 빠르게, 어떤 와인은 느릿느릿 진화해가니 이것을 도식화 할 수 없어 어려움이 갖게 된다. 그렇다고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여러 병을 사서 차례로 마셔 본다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시도도 ‘덤 페이즈’를 피하기 쉽지 않으며, 와인 애호가로서 이 정도 좌절은 각오하고 와인을 마셔야 한다고 여겨진다.따라서 와인의 변화 과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시기에 주어진 와인 품질을 이해하고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와인의 현상을 탓하기보다 추후 놀랄만한 경험을 하게 되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는 낙천적 태도가 더 낫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와인이 기대 이하라고 실망한다면 인내심의 문제일 수 있으며, 어린 과일 향을 원하면 어린 와인을, 그러나 원숙한 풍부한 향을 원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에 대한 보상은 언젠가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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