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마시는 술, 세주(歲酒)

누구에게나 시작이라는 의미는 꽤 크다. 늘 그렇듯 1년을 반복할 때마다 새해를 맞는다. 더불어 매번 그래왔듯이 시작의 즈음에 또 서게 된다. 우리 민족은 ‘설’이라는 이름으로 ‘진짜 시작’을 시작한다. 술이 빠질 수 없다. 차례를 지내야 하고 사람들도 꽤 모이니 당연하다. 이때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고 한다. 혹시, 처음 들어보진 않았는가?

설날 아침 차례상에 올리거나 이웃과 같이 먹기 위해 준비하는 세찬(歲饌)과 함께 마시는 정초(正初)의 술이 세주다.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할 때 올리고 마시는 술도 세주여서 보통 정초에 마시는 술을 통틀어 말한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설날이 되기 전 집집마다 세주를 담그고, 설날 아침이면 나이가 적은 사람부터 돌려가며 세주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보통 약주와 청주가 많이 쓰였다. 여름에 미리 누룩을 만들어 두었다가, 이 누룩으로 흰쌀이나 찹쌀을 원료로 해서 빚은 양조주가 많았다.

여러 종류의 술 가운데 특히 정월 초하루인 설날 아침에 마시는 술을 ‘도소주(屠蘇酒)’라고 했다. 이날 도소주를 마시면 1년 동안 사악한 기운이 없어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도소주를 담그는 법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알려진 방법 중 하나는 약재를 비단 주머니에 싸서 섣달 그믐날에 우물 속에 담갔다가 설날 이른 새벽에 꺼내어, 청주에 약재를 넣고 잠깐 끓인 다음 식혀서 차게 해 마셨다고 한다. 이 술에 대해선 ‘한 사람이 먹으면 한 집에 역질이 없고, 한 집이 먹으면 한 고을에 역질이 없다(一人飮之 一家無疫 一家飮之 一鄕無疫)’이라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달리 말해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건강까지 챙겨주는 술이라는 뜻이다.

도소주를 마시는 풍습은 중국에서 시작됐다. 후한(後漢)의 명의(名醫) 화타(華陀)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당(唐)나라의 손사막(孫思邈)이 처방했다는 설도 있다. 이 술은 도라지, 산초(山椒), 방풍(防風), 백출(白朮), 육계피(肉桂皮), 진피(陳皮) 등을 넣어 빚는다. 설날 아침에 세찬과 함께 마시면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오래 산다고 전해진다. ‘도소(屠蘇)’라는 말은 소(蘇)라고 하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세주는 데우지 않고 마시는데, 이에는 봄을 맞이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歲酒不溫 寓迎春之意)”고 기록돼 있다. 데우지 않은 찬술을 마심으로써 정신을 맑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알려졌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설날에 마시는 술로 즐겨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도소주를 마시기 전에는 우선 초백주(椒栢酒)라고 해서 후추알 7개와 동쪽을 향해 돋은 측백(側柏) 나뭇잎 7개로 섣달 그믐밤에 담근 술을 마시고, 도탕(桃湯)을 먹는 것이 순서로 돼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그 당시에는 도소주를 그다지 애음(愛飮)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기의 학자들은 “머리는 옛날과 같고 도소주를 얻어 마시네”라며 정월 원일(元日)에 도소주를 마신 흔적을 시(詩)로 기록하고 있다.

도소주를 마실 때는 나이가 적은 사람부터 마신다. 이는 젊은 사람은 나이를 먹어 점차 어른이 돼 가는 기쁨이 있으니 이것을 어른들이 축하한다는 뜻이다. 반면 나이든 사람은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축하할 일이 아닌 오히려 서러운 일이니 먼저 권하는 게 예가 아니라는 배려가 담겨 있다. 설날 하루 동안의 술잔 따르는 순서로는 오늘날 복원해도 괜찮은 전통이다.

 

세주불온(歲酒不溫). 앞서 말했듯이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다가올 봄에 맑은 정신으로 일하기 위해 설날엔 술을 차게 해 마셨다. 문제는 찬 술은 데운 술보다 쓴맛이 적어 자칫 과음하기 쉽다는 점이다.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모이는 설날, 효과적으로 술 마시는 방법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다.

먼저 공복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은 피해야 한다. 배고픈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위에서 알코올이 빠르게 흡수돼 빨리 취하고 속도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운동 전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듯 술을 마실 때도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면 위에 보호막이 생겨 위가 덜 상하고 덜 취하게 된다.

술 마시기 한두 시간 전쯤 차례상에 올려놓았던 떡국 한 그릇으로 미리 배를 채워두는 것이 좋다. 떡국은 위벽을 보호해 준다. 특히 떡국에 들어 있는 탄수화물이 포만감을 줘 음주량도 줄어든다.

그러나 갈비, 산적, 잡채 같은 기름진 음식은 술 마시기 전에 먹는 음식이나 안줏감으로 좋지 않다. 이 음식들은 열(熱)과 단(甘) 성질을 갖고 있는데 술의 성질도 열하고 독(毒)하다. 이들은 술의 성질을 순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증강시켜 소화에 부담을 준다.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추, 밤, 배, 감 등의 조율이시(棗栗梨柿)는 안주로도 그만이다. 이들은 각종 장기(臟器)의 기능을 보강하고 알코올을 중화시키는 효능이 있어 술안주로는 최고다. 특히 감의 탄닌 성분은 알코올 흡수를 지연시켜주며, 위장 속의 열독(熱毒)을 제거하고 갈증을 멎게 한다. 또 소변을 순조롭게 해 술을 빨리 깨게 하는 효능도 있다. 그러나 홍시는 위통을 일으킬 수 있고 술에 더 취하게 해 먹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차례상의 삼색나물도 훌륭한 술안줏감이다. 버섯, 생선, 두부도 속을 편하게 해주는 안주로 꼽힌다.

술을 마시면 혈당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몸은 허기를 느끼게 된다. 이럴 땐 간단하게 약식과 함께 시원한 동치미를 마시면 허기가 사라지고 갈증도 해소된다. 동치미의 무엔 비타민 A, B, C와 칼슘이 풍부하다. 또 전분 분해 효소인 아밀라아제가 들어있어 소화를 돕는다. 따라서 약식과 동치미, 떡과 동치미는 환상의 궁합이다.

음주 후 밥을 먹을 수 없을 만큼 속이 거북하면 식혜나 수정과를 권한다. 음주로 부족해진 수분이나 당분, 전해질을 모두 보충할 수 있으며 숙취해소에도 좋다.

참고로 녹두는 술독을 제거하는 효과가 뛰어나다. 특히 녹두죽은 소주의 독을 푸는데 최고의 효과를 낸다.

 

 

일본

보통 일주일 이상 긴 설 연휴를 갖는다. 신정만이 유일한 설날이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 음식을 함께 먹으며 정담을 나누는 등 설 쇠는 방식은 우리와 비슷하다. 새해 음식으로는 ‘모찌’와 섣달 그믐날의 특별 야참인 ‘소바’(메밀국수)를 먹는다. 새해를 맞는 흔한 풍습 중 하나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고다스’라고 부르는 전기난로에 둘러앉아 소바를 먹는 것이다. 재밌는 건 우리의 떡국과 같은 ‘조니’를 먹는데, 일본사람들도 이 조니를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며 기분을 낸다. 일본사람들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설음식도 조상 숭배가 아닌 신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성격이 강하다. 설날 아침에는 여성의 경우 기모노를 입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예를 갖춘 식사를 한다. 밥을 먹기 전에는 약초로 만든 ‘토소’라는 소주를 마시는데, 남자 가장이 정좌를 하고 나이순으로 술을 권하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다. 정초에 이 술을 마시면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건강에 좋다는 믿음에서다.

 

중국

설날은 최대 명절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력 1월 1일은 하루의 휴일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대신 음력설을 크게 지낸다. 보통 2주 정도의 긴 설 연휴를 갖는다. 중국에선 설음식으로 물만두와 중국식 떡을 먹는다. 주로 북쪽지방 사람들은 물만두를, 남방 사람들은 떡을 먹는다. 모두 1년 내내 행운을 빌기 위해 먹는 음식이다. 새해맞이는 온 가족이 함께 대청소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청소 도중에는 가위, 칼 등 자르거나 오리는 도구들은 모두 감춘다. 새해의 복을 자르거나 쪼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새해 희망이나 바람을 담은 긴 종이를 벽에 붙이기도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빨간색 봉투에 세뱃돈을 담아 준다.

 

스코틀랜드

새해맞이를 ‘호그마내이(hogmanay)’라고 부른다. 첫 번째 방문자가 행운을 가져올 수도, 불운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믿는다. 보통 까맣거나 어두운 색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행운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새해음식은 특별한 것이 없고 일반적으로 가족끼리 함께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식탁이 채워진다.

 

이탈리아

녹두를 넣어 요리한 음식과 발톱까지 보이는 돼지족발 요리가 12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밤부터 새해로 이어지는 만찬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음식이다. 새해맞이 음식으로 이것들을 먹어야 부자로 잘 산다고 믿는다.

 

멕시코

새해 1월 1일이 되기 바로 직전인 12월 31일 자정에 시계탑 종이 12번 울리면 이에 맞춰 포도알 12개를 먹으며 12가지 소원을 빈다. 이는 새해 12개월, 즉 매달 소원을 미리 비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집안 구석구석에 돈을 감춘 다음 가족들끼리 함께 찾는 풍습도 있다. 이로써 가족들끼리 친목을 다지고 모은 돈으로 설날 저녁상을 마련한다.

 

베트남

우선 설날 전에 수박을 준비했다가 설날 손님들이 모이면 수박의 가운데를 가른다. 가른 수박 가운데의 빨갛게 익은 정도를 보고 한 해의 길흉을 점친다. 또 녹두와 돼지고기를 넣은 찹살떡인 ‘바인 쯩’을 바나나 잎에 싸뒀다가 손님들에게 대접한다.

 

러시아

동양적인 색채와 유럽의 색채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러시아다. 새해가 되면 가족들과 식사 전 우리 식의 귀밝이술인 ‘윗가’를 마시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인도

온 가족이 모인 집안 마당에서 냄비에 불을 지펴 우유와 쌀이 들어간 죽을 끓인다. 죽을 끓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데, 죽이 잘 안 끓여지든지 냄비가 깨지면 불행이 닥친다고 믿는다. 반대로 죽이 잘 끓여지면 행복해진다고 믿으며, 이 죽을 무화과 잎사귀에 싸서 친지들에게 선물한다.

 

그리스

새해 첫 날에는 성자(聖者) 바질(Basil)을 경축하기 위한 축제를 연다. ‘바질의 신발’이라 정한 것을 화로나 불 옆에 놓고 성자 바질의 선물이 채워지길 기원한다. 음식으로는 ‘바질로피타(vassilopitta)’라고 부르는 새해 이브 케이크를 구워 먹는다.

 

이스라엘

우리나라가 음력 설날을 명절로 맞이하듯이 이스라엘도 유대 달력에 따라 양력으로 9월에 새해맞이 행사를 한다. ‘로쉬 하사나’로 부르는 설날에는 서로 행운의 덕담을 하면서 꿀에 담근 사과나 대추야자, 호박, 사탕무를 먹는다.

 

이란

시르(마늘), 세르케(식초), 십(사과) 등 이란어로 ‘시’로 시작하는 7가지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장만한다. 이 재료들은 풍요, 즐거움, 건강, 행복 등을 상징한다.

 

이집트

인구의 90% 정도가 회교도인 이집트에선 회교력을 사용한다. 따라서 1월 1일은 그들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이집트 젊은이들 사이에선 1월 1일을 특별하게 보내는 게 유행인데, 이는 서양에서 12월 마지막 날에 여는 파티를 흉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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