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酒동행
막걸리와 위스키 그리고 검정치마
문경훈 술칼럼니스트
그러니까 그날은 굳이 표현하자면 황망한 날이었다. 슬프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고 가슴 아픈 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내 심정은 황망했다. 실제로 친구와 수 시간 동안 이 가게 저 가게 전전하며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무슨 추임새마냥 ‘황망하다’라는 말을 계속 내뱉어댔다. 심지어 그렇게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서도 웬일이지 우리는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눴고 홀린 것처럼 황망하다는 말을 전했으니 말 다 했다. 인디가수 정차식의 솔로앨범 이름마냥「황망한 사내」가 그 순간만큼은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황망했던 그 날 난 술기운의 힘을 조금 빌려서 한동안 못 보고 지내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뻔 한 술버릇이라고 흘려버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날은 특별했다.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건다.’는 건 음주 인구의 약 40퍼센트 정도는 가지고 있을 흔하디흔한 술버릇인데 난 뭐가 황망했고 또 동생한테 전화를 걸은 게 무엇이 특별하다는 것인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여하튼 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는 말을 전했고 그렇게 며칠 뒤, 우리는 문래동에서 몇 년 만에 볼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녀석은 학부생 시절부터 요즘 말로 상당히 ‘힙(hip)’한 녀석이었고 난 그들의 힙함을 열심히 배우는 힙스터 모범생이었는데, 당시 문래동은 그 방면으론 유명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과 난 부지런히 얘기를 나누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힘들 다기엔 넓지 않은 곳이었고 봄은 오지 않았지만 춥지도 않았던 2월의 저녁 무렵이었다. 보지 못 했던 시간에 비례해 나눌 말이 많았던 우리의 걸음은 어느덧 문래동에서 마포에 이르렀다. 단지 식사만으로 이 밤을 보내기 싫었던 우리는 창천동 어느 골목 사람 많은 주점에 앉아 홀린 듯 막걸리 한 병을 시키고 잔을 채워 마른목과 입술을 적셨다. 사실 나에 비해 술을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또 한 잔을 채우고 쫓기듯 털어 넣었다.
취하는 게 능사는 아니니 천천히 마시라는, 짐짓 선배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막걸리는 시원했고, 조금 달고 또 제법 씁쓸했다. 좋았다. 적당히 서늘한 막걸리도, 남들만큼 커지는 우리 목소리도, 불콰해진 얼굴과 주제 따윈 상관없다는 듯 내뱉어대는 우리의 대화도. 나는 망설임 없이 막걸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훨씬 더 달콤하고 묵직한 맛이었다. 두 번째 막걸리와 함께 이런 저런 사는 얘기가 오갔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내뱉는 얘기는 마시는 술만큼 달지는 않았다. 너도 나도 웃고 있지만, 그래, 사는 게 막걸리만큼 달고 시원하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쓴 맛만 닮고 말았다. 사람이 최고라지만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했다. 인생이 원래 달기만 할 순 없다고 괜히 막걸리 탓을 하며 다른 술을 골랐다. 오미자 맛이라는 세 번째 술은 달고, 시고, 쓰고, 떫고 그리고 짜다고 했다, 5가지 맛을 느끼기엔 너무 둔감해서 대충 2~3가지만 느끼는 나지만, 대충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도 가슴 한 켠이 공허했고 다른 무언가 필요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이야기했다. 동생과 내가 좋아하는 음악 취향은 흡사 막걸리와 위스키만큼이나 멀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현실 따윈 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술안주로 그만한 게 없었으니까. 주점을 나왔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고 단지 노래를 듣고 싶었다. 2월의 늦은 밤은, 입김이 나오도록 시렸지만 세 병이나 들이킨 술 덕에 춥지 않았고 오히려 오른 열기를 식혀주는 찬 공기가 고마웠다. 겨울밤 인적은 드물었고, 가로등불이 빛나고 있는 새카만 골목길엔 작은 간판이 하얗게 빛났다. 간판엔 이름도 없이 검은색 레코드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저할 필요 없이 문을 열었다. 안에는 얼마 되지 않는 LP판이 있었고, 큰 스크린에선 이름 모를 여가수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LP판만큼이나 가짓수가 적은 메뉴판은 선택의 고민을 덜어주었고, 난 싱그몰트 한 잔을 주문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난 취했고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녀석이 들려준 노래 하나는 그 하루의 기억을 지배할 정도로 기억에 남았다. ‘나랑 아니면’, 밴드 검정치마의 3집 수록곡이었다.
나른하면서 수려하지만 어쩐지 음울한 멜로디, 수줍고 몽환적인 보컬. 종일 곡을 감싸는 부드러운 현악기와 그에 어울리는 전자기타 소리가 인상적인 검정치마 3집의 타이틀 곡이었다. 곡 자체도 훌륭하지만 가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수줍은 목소리에 대비되는 직설적이고 강렬한 메시지의 묘한 괴리가 더욱이 가슴을 후볐다. 고백이라 치기엔 왠지 음울한 멜로디는 화룡점정이다. 도무지 위스키를 연달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노래였다.
황망한 날과 동생에게 건 전화, 막걸리에 이은 위스키, 그리고 대중가요 가사까지. 의미 없이 나열한 어느 일상같지만….
술에 취해 뻔 하디 뻔 하게 전화를 건 그날은, 세 살 위의 선배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황망했다.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과거에 태어났다면 장군 정도는 너끈히 했을만한 체구와 힘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부름이었다. 선배와 난 딱 술잔을 기울인 만큼만 친한 사이었지만 인명의 덧없음에 황망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문득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두려워졌고,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당장 만나지 않으면,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듣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또 그렇게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 전엔 원하지 않게 멀어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상하게도 딴에는 그들을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나의 마음이, ‘저 사람은 바쁠 테니까, 힘들 테니까, 내가 어려울 테니까’하는 마음이 되레 그들과 내 사이를 점차 멀어지게 만들었다. 어느새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 되고 있었다.
“야, 나랑 놀자. 밤늦게까지
함께 손뼉 치면서
나랑 마셔. 너와 나의 몸이 녹아내리면
나랑 걷자. 저 멀리까지”
-검정치마, ‘나랑 아니면’ 中-
‘나랑 아니면’에서 조휴일은 수줍지만 망설임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나랑 놀자고, 나랑 마시자고, 나랑 걷자고, 나랑 자자고 말했다. 네가 나랑 아니면 누구랑, 대체 누구랑 놀겠냐고 말했다.
내가 그날 이 노래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저 직설적인 메시지 때문이었다. 먼저 다가가지 못 해서 결국 떠나보내거나 멀어졌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셔도 후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날 마셨던 술만 봐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마포에서 마셨던 막걸리와 위스키는 1차와 2차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선뜻 떠오르는 조합도 아니었지만 결국은 술이었다. 나 혼자 나누고 친 빗장에 막걸리도 위스키도 마시지 못했던 날들이, 그리고 그 날만큼의 사람이 있음에 마음 아팠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에겐 그런 용기 있는 고백도 필요하다고.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다.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