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 칼럼
애주가 정조 여인에 대한 사랑도 깊었는가
박정근
(대진대 영문과 교수, 윌더니스 문학 발행인, 소설가, 시인)
술꾼인 정조가 어떤 사랑을 추구했을까. 참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궁녀 덕임을 어린 사춘기부터 사랑하여 신분의 차이로 한사코 거부하던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드린 정조는 조선의 왕 사이에서 가장 낭만적인 사랑을 구가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의 사랑은 낭만적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정조의 영원한 사랑인 덕임, 이후에 후궁 의성 성씨가 만삭의 몸으로 죽음의 길로 떠나자 애통해 하며 쓴 시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바람 부는 소리에 슬퍼하여 밤에 술잔을 올리노라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해도 볼 수 없구나!
나는 글로써 너를 보내노라
이 시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려보내기 않는 호남아 정조의 시라고 보기에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술을 피하는 신하들에게 이런저런 명분으로 억지로 마시게 해서 쓰러뜨리곤 했던 정조가 아니던가. 어떻게 그가 후궁 의빈 성씨에게 이런 애틋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후궁 의빈 성씨가 죽은 후에도 그녀를 무척 못 잊어 사랑의 상실로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를 임의 속삭임으로 들었던 것일까. 그녀를 모신 영정에 술을 올리는 모습은 수많은 여성을 왕의 권위로 농락하는 다른 왕들과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조는 의빈 성씨에 대한 사랑도 애주가답게 술을 올림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부재한 연인은 술을 올린다 한들 돌아올 수 없다. 정조는 죽음이 연인의 복귀를 가로막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죽음이 가져온 육체적 한계를 시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시 속에 그의 사랑을 담아 저승에 있는 연인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는 왕세손의 신분이었을 때부터 궁녀 덕임을 무척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영조 38년에 궁녀로 입궁하여 헌경왕후가 기르다시피 한 궁녀 덕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의 탓인지 그의 프러포즈를 사양했다. 감히 왕세자의 구애를 거절한 덕임이라는 여인의 곧은 심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영조 49년에 국문소설을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강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왕이 되어 내린 승은을 다시 거부했다가 분노를 표시하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후궁이 되었다.
의빈 성씨의 행운은 거침이 없는 듯 했다. 그녀는 왕자와 옹주를 연이어 출산하여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조금 전에 순산하여 딸을 얻었노라. 아들을 생산한 데 이어 딸이 생겼으니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도다”라고 기쁨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신이 그녀의 행복을 시샘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녀가 낳은 문효세자와 옹주가 모두 너무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의빈 성씨는 1786년(정조 10년)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애주가 정조를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칭송하는 이유는 의빈 성씨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조는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생시의 사랑을 일관되게 보여주기에 그의 사랑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정조는 의빈 성씨의 묘표에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다.
빈은 절망하여 문효를 따라 죽기를 항상 소원하더니
드디어 문효의 무덤 옆으로 떠나갔구나.
빈은 비로소 해원하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구나.
폭주가로 알려진 정조가 빈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사랑을 이미 저승으로 떠난 후에도 묘표뿐만 아니라 묘지명에도 적었다. 그는 빈이 죽은 지 세 달이 되는 시점에 고양군 율목동 묏자리 언덕에 장사를 지내며 묘지명에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원컨대 장차 위로가 되리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호탕하게 술을 마시던 정조를 두고 폭주가라고 분류하는 것은 그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본다. 그야말로 정조는 역대 어느 왕도 보여주지 못한 낭만주의적 성격을 지녔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