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부터 마셔…조선시대엔
궁궐, 사대부, 백성까지 모두 즐겨
정월 첫 돼지날부터 시작해
매월 돼지날마다 3번 빚어
향이 참 맑다. 살다보면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코나 입, 귀나 손으로도 느낄 때가 있다. 더구나 살아온 그 즈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걸 새롭게 알게 될 때, 사는 맛 제대로 난다. 삼해주(三亥酒) 한 잔 얻어 마신 그 순간, 그걸 느꼈다. 몰라서 못 마셨던 걸 이제 알게 됐으니 기분 좋게 마시면 그 뿐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삼해주는 찹쌀을 발효시켜 세 번 덧술해 빚는 약주(藥酒)다. 정월 첫 해일(亥日?돼지날)에 시작해 매월 해일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삼해주다. 시간도 해시(亥時)에 맞춘다. 돼지가 상서로운 동물이고, 해일이 술 담그기엔 더없이 좋은 길일(吉日)이기 때문이다. 이 술은 정월 첫 해일에 담가 버들가지가 날릴 때쯤 마신다고 해서 ‘유서주(柳絮酒)’라고도 부른다.
삼해주는 그 기원이 깊다. 알려진 바로는 고려시대 때부터 빚어 마셨다.《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태평한화(太平閑話)》,《주방문(酒方文)》,《역주방문(曆酒方文)》,《조선세시기(朝鮮歲時記)》등의 옛 문헌에 만드는 방법이 기록돼 있다.《추관지(秋官志)》를 보면 당시 권력층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삼해주를 애음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순조(純祖?1790~1834)의 둘째 딸 복온공주가 안동김씨 가문으로 출가하며 궁중술이었던 삼해주를 전했다. 이후 이 술은 안동김씨 가문의 제주(祭酒)로 쓰이고 집안 경사나 잔치 때에도 상에 올렸다. 현재 삼해주 기능보유자인 권희자(權熙子) 선생까지 5대째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까 복온공주는 권희자 선생의 5대 조모(祖母)가 되는 셈이다.
삼해주의 특징은 세 번 덧술한다는 것과 시기적으로 정월 첫 해일의 낮은 기온을 택해 12일간의 오랜 발효기간을 거친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문헌에서도 공통적이다. 빚는 기간만 100여일이 걸린다. 재료는 쌀과 누룩으로만 빚는다. 누룩은 하얀 백곡을 쓴다. 10℃ 안팎의 저온에서 장기간 당화, 발효시킨다. 발효주이면서도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삼해주는 엄밀히 말하면 ‘삼해약주’다. 증류식 소주인 ‘삼해소주’도 있기 때문이다. 두 술은 뿌리(가문)와 정통성이 확연히 달라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이 둘을 포함해 향온주와 송설주가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주다.
“며느리에서 며느리로…5代째 이어와”
삼해주 기능보유자 권희자 선생
조선시대 학자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은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는 삼해주에 대한 소개가 잠깐 언급돼 있다. 권희자(權熙子?69) 선생은 그 부분을 살짝 인용하면서 삼해주를 소개했다.
“옛날 병으로 시달리던 한 노인이 결코 죽지 않겠다고 떼를 썼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단지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승에서 맛본 삼해주를 저승에선 더 이상 맛볼 수 없을 테니 안타까워 그렇듯 죽기 싫다고 떼를 쓴 거랍니다. 삼해주를 맛보지 못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거지요.”
확실히 맑고 깊다. 은은하면서도 생각보다 도수(度數)가 세다. 입안에서의 울림은 꽤 오래 간다. 마침 비가 내려서인지 마당의 흙냄새와 잘 어울리고 또 섞인다. 그런 술이다, 삼해주는.
“고려 때부터 시작한 삼해주는 조선시대 궁중술이기도 했지만 사대부가는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즐겨 마셨던 술이라고 해요. 그 당시 중림동, 그러니까 지금의 마포쯤 되겠네요. 그곳에 삼해주를 빚었던 술도가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권희자 선생이 빚는 삼해주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23대 임금 순조(純祖)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가 안동김씨댁(宅)으로 시집가면서 궁중음식과 궁중술이었던 삼해주가 안동김씨 가문에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이 술은 제주(祭酒)나 손님 대접용으로 사용됐다.
이후 며느리에서 며느리로 계속 이어져 권 선생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가 5대(代)째며, 권 선생의 두 며느리 역시 운명처럼 잇고 있다.
“제가 하기 싫다고 해서 빚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며느리의 도리라는 것 말예요. 저도 시어머니 옆에서 음식과 함께 배우다보니 어느 순간 익숙해져 있더라고요. 물론 처음엔 쉽지 않았어요. 이걸(술 빚는 일)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건 한참 후였지요. 생각해보면 삼해주는 우리 집안 며느리들에겐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실, 기능보유자가 되기까지 그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전수교육자를 거쳐 이수자, 전수조교에 이어 기능보유자가 되는데, 이를 심사하는 각 지자체의 평가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기까지 짧게는 5~6년에서 보통 그 이상이 소요된다. 권 선생은 지난 1993년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2년 동안 그 역사성과 전통을 검증하고 인정해 기능보유자로 선정됐다. 권 선생의 며느리들은 현재 이수자까지 인정받았고, 둘 중 누가 후계자에 해당하는 전수조교에 이를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권희자 선생은 “술은 문화유산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지역에서든 문화상품을 판매하잖아요. 단순히 파는 것에 그쳐선 안 돼요. 술의 경우 이를 빚는 과정, 만들어온 역사, 술도가의 내력 등을 함께 알리는 일에 충실해야 하죠. 보여주고 맛보게 하며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는 것 아니겠어요?”
그의 말이 맞다. 그런 일련의 노력들은 외국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보는 게 솔직하다. 우리의 술은 알고서도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몰라서 못 마시는 술이다. 바꿔 말하면 알게 된 이상 수요는 늘 것이고, 여기에 우리 술 배경까지 덧입혀지면 자연 찾는 이가 많을 것이라는 얘기다.
권 선생은 현재 서울 종로구 재동에 위치한 서울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에서 삼해주를 비롯한 우리술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02-747-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