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우리말, 우리얘기 ?

이 코너는 중앙대학교 남태우 교수(문학박사)가 그동안 펴낸 술 관련 저서 가운데 주당들이 알아두면 재미있을 부분만 발췌해 연재하는 것입니다. 남태우 교수는 ‘비틀거리는 술잔, 휘청거리는 술꾼이야기’(1998)를 시작으로 ‘주당별곡’ 등 술에 관한 많은 저서를 펴냈습니다. 지금도 술에 관한 재미있는 책을 계속 펴낼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옹송옹송하다’…과음 후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
술에 관한 우리말 시리즈

야구경기를 관람할 때 야구 룰을 모른다든지,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의 역사를 바꿔 놓은 김연아의 피겨 경기 규칙을 모른다면 보는 재미가 있을까. 어느 분야든지 그 분야만의 전문용어나 룰이 있기 마련이다. 주당(酒黨)들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룰이 지켜져야 술자리가 재미있지,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재미는커녕 짜증나고 지겨울 뿐이다.
주당들 세계에도 멋진 전문용어가 많다. 혹자들은 “그까짓 거 아무렇게나 마시면 되지 골치 아프게 알아둘 필요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왕지사 주당들 세계에 입문해 평생을 마실 술이라면 용어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어떨까.
술로 사는 인생인 주당들도 간밤에 너무 마셔서 아침이 돼도 ‘옹송옹송하다’고 말하면 이 말이 영어야 불어야 하겠지만 분명 우리말이다. 주력(酒歷)이 꽤 된 사람들도 ‘풋술’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정도로 술에 관한 용어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많다. 중앙대학교 남태우 교수(문학박사)는 그의 저서 《홀수배 飮酒法의 의식과 허식》에서 “술과 연관된 유사어 만큼 어휘가 많은 것은 우리말 중에 최고라고 생각한다”며 ‘술에 관한 우리말 시리즈’를 소개했다. 여기에 남 교수의 도움을 받아 ‘술에 관한 우리말 시리즈’ 중에서 주당들이 알아두면 주석에서 흉 떨리지 않을 만큼 유식해질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편집자 주>

우선 누룩을 섞어 버무리는 것을 술밑이라 한다. 즉, 술의 원료다. 또 술밑으로 쓰려고 찹쌀이나 멥쌀을 불려 시루에 찐 밥을 지에밥이라 하고, 술을 담글 때에 쓰는 지에밥을 술밥이라고 한다.
술을 따를 때_술을 부어 잔을 채우는 것을 치다라고 하고, 술이 잔에서 넘치도록 많이 따르는 것을 안다미로라고 한다. 앞의 것의 품사는 동사고, 뒤의 것은 부사다.
술을 마실 때_맛도 모르면서 마시는 술은 풋술이라 하고 술 많이 마시는 내기는 주전(酒戰)이라고 하며,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은 강(깡)술이고 미친 듯이 정신없이 술을 마시는 것은 광음(狂飮)이라 한다. 풋술, 주전, 강술, 광음은 모두 명사다.
술 마신 다음날_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들척지근한 냄새를 문뱃내라고 하고, 정신이 흐려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고 흐리멍덩한 상태는 옹송옹송하다고 한다. 술을 마셔도 취기가 없어 정신이 멀쩡한 상태는 맨송하다나 민숭하다고 한다.
늘 대중없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모주망태라고 한다.
술기운이 차츰 얼굴에 나타나는 모습은 우럭우럭이라고 하고, 술에 취해 거슴츠레 눈시울이 가늘게 처진 모습은 간잔지런하다고 하며, 술에 취해서 눈에 정기가 흐려지는 것을 개개풀어지다라고 한다. 얼굴빛이 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 불그레한 상태는 불콰하다고 하며, 술기운이 몸에 돌기 시작해 딱 알맞게 취한 상태를 거나하다고 한다. 술이 거나하여 정신이 흐릿한 상태는 건드레하다고 하며, 비슷한 상태인 몹시 취하여 정신이 어렴풋한 상태를 얼큰하다나 얼근하다고 한다. 알딸딸하다도 비슷한 상태를 말한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는 것을 주전(酒癲?酒顚)이라고 한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코와 입에서 나오는 독한 술기운은 소줏불이라 한다. 술을 한량없이 마시는 모양, 또는 그런 상태를 억병이라고 한다.
술에 취한 모습을 나타내는 우리말에는 먼저 해닥사그리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는 술이 얼근하게 취해 거나한 상태를 말한다. 해닥사그리한 단계를 지나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취한 상태를 곤드레만드레라고 하고, 술에 몹시 취해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나 또는 그런 사람을 고주망태라고 한다. 술에 먹힌 다음 정신없이 쓰러져 자는 것은 곤드라졌다고 한다. 곯아떨어지다와 같은 말이다. 술에 취해 정신없이 푹 쓰러져 자는 것을 군드러지다라고도 한다.
술에 취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또는 그 말을 잔주라고 하고, 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은 주사(酒邪)라고 하며, 술에 취해 정신없이 말하거나 행동함,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주정(酒酊)이라고 한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를 만취(漫醉?滿醉)라고 하며, 이를 우아한 표현으로는 명정(酩酊)이라고 한다.
술을 많이 마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취한 상태를 고주망태가가 됐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고주와 망태의 합성어다. 옛말이 ‘고조’였던 고주는 ‘술을 거르거나 짜는 틀’인데 오늘날에는 ‘술 주(酒)’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망태는 망태기의 준말로 ‘가는 새끼나 노로 엮어 만든 그릇’을 이르는 말이다. 술 주(酒)자 위에 술을 짜기 위해 올려놓은 망태이기에 언제나 술에 절여 있는 것은 당연하다. 술을 많이 마셔 취한 상태인 고주망태란 말은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고주망태 또는 곤드레만드레를 수사학적으로 ‘명정(酩酊)’이라고 한다. 명정(drunkeness or alcohol intoxication)이란 술을 많이 마셔서 일어나는 인체의 일시적 반응을 의미한다. 명정(酩酊)에서의 명(酩)은 ‘술 취할 명’이고, 정(酊) 또한 ‘술 취할 정’이다. 명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대취한다는 뜻이지만, 주신(酒神)들에게야 명정은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오르는 ‘명정(明淨)’일 것이다. 명정에는 ‘병적명정(酩酊)’이라 해서 의식장애와 정신운동성의 흥분을 나타나게 하고, 나중에는 건망증을 일으키게도 한다. 명정과 유사한 말로 만취(漫醉), 대취(大醉), 이취(泥醉), 극취(極醉), 난취(爛醉) 등이 쓰인다.
명정을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호리건곤(壺裏乾坤)’으로, 항살 술에 취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건곤은 해와 달, 곧 늘, 밤낮의 뜻이다. 후한(後漢) 때 호공(壺公)이라는 선인(仙人)이 항아리 하나를 집으로 삼고 술을 즐기며 속세를 잊었다는 얘기에서 온 말이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유배된 선인 호공은 늙은이 모습으로 여남현(汝南縣)에서 영약을 팔았다. 그는 집 처마에 조그만 단지를 매달아 놓고 저녁이 되면 이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시장 관리인 비장방(費長房)이 요청한 선술(仙術)을 빌려 단지 안에 들어가 보니 그 속에는 금각옥루(金閣玉樓)가 있었으며, 산해진미의 대접을 받았다. 이 고사는 ‘호중지천(壺中之天)’이라 해서 별천지?별세계를 의미한다. 뒤에 호공이 하늘의 용서를 받아 천계(天界)로 돌아갈 때 비장방도 그를 따라갔는데, 선술을 배우는데 실패해 지상으로 돌아오고, 그나마 조금 익힌 선술로 장수하며 지상의 악귀들을 퇴치했다고 한다.
명정에 ‘주태’를 부리면 주사가 된다. 일반적으로 주사(酒邪)는 ‘술에 취해서 하는 못된 버릇’으로 풀이한다. 영어로는 ‘Disorderly conduct 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또는 ‘Delirium tremens’라고 한다. 주사가 있는 사람을 ‘A vicious drinker’나 ‘A quarrelsome drinker’라 부른다. 대개의 경우 주사 부리는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하는 줄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대개는 인식을 하고 있다. 연신 육두문자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람, 했던 말을 하고 또 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사람, 앞뒤 옆 가릴 것 없이 싸움질을 걸어대는 사람, 고성방가는 예사고 덮어놓고 술잔을 돌려대는 사람, 마시지 않거나 못 마시는 사람을 등신 취급하는 사람 등으로 일별해 볼 수 있다. 주사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과음을 삼가는 편이 그 방편이다. 과유불급이 명처방이다. 그래서 17세기 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1593~1633)는 “술이 들어가면 지혜가 나가버린다”고 했다. 조선일보 오태진 논설위원은 2004년 10월 27일자 만물상에서 ‘주사파 척결’을 주문하기도 했다.
“정치 얘기 꺼내지 말고 돈 꿔 달라 하지 말라.” “술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하지 말라.” 어디서나 단아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아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는 항상 술친구들에게 ‘주석3불(酒席三不)’을 지키라고 했다. 전후(戰後)의 과장된 허무와 절망에 젖은 문인들의 술자리가 주사로 얼룩지기 일쑤였던 시절이라 이봉구의 음주 품격은 더욱 돋보였다. 춘원 이광수는 “주정 잘하기로 첫째가 아라사(俄羅斯·러시아), 둘째가 일본, 셋째가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술집인지 찻집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조용히 술 마시는 일본사람이 둘째로 꼽힌 연유가 궁금하지만, 우리네 주정이 러시아를 능가할 지경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술에 관대한 문화 탓이다.
주정에 더 이상 관대하기 힘든 사람들이 경찰이다. 파출소, 이른바 지구대는 밤 취객들의 난장판이 된다. 취객 한 명에 경찰이 서넛씩 달라붙어 밤새 실랑이를 벌여야 하니 치안은 뒷전이다. 제복이 찢기는 건 고사하고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지난해 전국 파출소에서 다룬 사건·사고 15만건 중 주정꾼 처리가 3만여건(21%)이나 됐다.
호주에는 ‘냉각실(chill-out room)’이라는 민간시설이 있다. 법에 따라 경찰은 취객을 6시간 이상 술 깰 때까지 이곳에 수용하고, 사람이 넘치면 경찰서 보호실에 가둔다. 영국은 주정꾼을 연행하는 전용차량을 두고 유치장에 36시간까지 감금한다. 미국은 만취 행인을 위협적 존재로 간주해, 이가 부딪칠 만큼 냉방을 세게 틀어놓은 보호실에 하룻밤 가둔다. 우리 경찰이 영국과 비슷한 ‘주취자 보호법’을 추진한다고 하자 술꾼들 사이에서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중요한 것은 나라 전체가 ‘술 말리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미국 술집에서 취한 손님이 술을 달라고 하면 주인은 “당신은 86”이라며 거절한다. 개척시대 독주(毒酒) 중 가장 도수가 낮은 86도짜리를 술이 약하거나 취한 사람에게 준 데서 비롯된 말이다. ‘86’ 통고를 받은 사람은 당분간 그 술집에 오지 못한다. 주(州) 알코올통제국 직원들은 술집에 미성년자 말고도 만취한 손님이 있는지 점검해, 발견 시 벌금을 물리고 영업정지까지 내린다. 웬만한 술집엔 프로레슬러처럼 우람한 사내가 지키고 있다가 주정꾼을 솎아내 쫒아버린다. 세상살이가 이래저래 퍽퍽해 ‘술 권하는 사회’에서 법 하나 만들어 고와질 술버릇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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