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酒동행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와 코냑
문경훈
음악을 듣다보면 종종 생소한 단어를 맞닥뜨리곤 한다. 2000년대 모든 남성들의 마음을 훔친 최고의 밴드 버즈-모 방송에서 한 남성 팬이 민경훈을 포옹하는 장면은 결코 놀랍지 않았다.
나였다면 두 번 안았을 것이다. 정말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버즈였다. -의 노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들으면 ‘텀블러 한 잔에 널 털↗어넘기고~’라는 가사가 나온다.
지금에야 텀블러가 흔하고 또 환경을 생각해서 개인 텀블러를 많이 들고 다니지만, 그 땐 도통 텀블러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룹 에프엑스의 노래 ‘피노키오’엔 ‘한 입 두 입 마카롱보다 달게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디저트에 관심 없던 필자만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 노래가 나오고 2년 후에서야 마카롱보다 달다는 게 어떤 표현인지 알 수 있었다.
텀블러와 마찬가지로 요즘에야 K-마카롱, 뚱카롱 열풍이 한창이지만 그 땐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던 디저트였으니까. 뒤늦게야 영접한 마카롱은 비싼 가격에 흠칫하긴 했지만 그만큼 맛있고, 또 정말 달았다. 1세대 인디밴드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항상 엔진을 켜둘게’에는 ‘아직은 어두운 하늘 천평궁은 빛났고’라는 가사가 있다. 분명 델리스파이스를 엄청 좋아하셨을 필자의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은 저 가사를 이용해 대충 다음과 같은 기말고사 시험문제를 내셨다.
다음은 한 인기밴드의 노래 가사이다. 밑줄 친 새벽이 대략 03~04시 사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은 몇 월인가?
휴일을 앞둔 밤에 아무도 없는 새벽 도로를 질주해서 바닷가에 아직은 어두운 하늘 천평궁은 빛났고 차안으로 스며드는 찬 공기들 |
시험 중 아는 노래가 나오는 반가움과는 별개로 지구과학 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나는 당연하게도(?) 이 문제를 틀렸고, 이후 오답풀이를 하면서야 천평궁이 천칭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나온 김에, 델리스파이스의 숨어있는 또 다른 명곡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를 들어보자. 이 곡은 동경의 한 민속악기점에서 만난 앙칼진 검은 고양이와의 이야기를 지루할 틈 없이 마이나 코드의 극적인 전개로 풀어낸 명곡이다. 곡의 배경이 되는 민속악기점에 대한 묘사가 제법 상세하게 이루어지는데,
예컨대 ‘좁아터진 골목 7층 간판은 민속악기점’ 이라든지 ‘이름도 모를 악기들로 둘러싸인 그 방 한구석’, ‘붉은 카페트와 인도산 인센스, 칭칭 휘감기는 기타 연주’ 등과 같은 가사가 그것이다.
그런데 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도통 저 ‘인센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물론 인터넷에 검색 한 번만 했으면 알 수 있었겠지만… 단어 공부하려고 노래를 듣는 것도 아니고 음악이란 대충 느낌(?)이 중요하니까 구태여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인센스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 망원동의 한 바(bar)에서였다.
잠깐, 명색이 음주(音酒)동행인데 술 얘기를 빼먹을 수 없다. 세상에 발표된 음악이 많을지 술이 많을지 세어 보진 않았지만-물론 음악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세상엔 정말 많은 술들이 있다.
그리고 어린 날 노랫 속 가사처럼 이름만으론 생소한 술들도 많다. 지금에야 술 좀 안다고 소심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지만 어디 처음부터 그랬을까.
소주, 맥주, 막걸리야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위스키만 해도 블렌디드 위스키, 싱글 몰트 위스키, 라이 위스키, 버번 위스키, 인디아 위스키 등에, 칵테일을 마시려 해도 메뉴를 보면 기본으로 수십 종이 있는데다 이름으로는 도저히 맛을 유추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대부분의 칵테일 바에는 이름 밑에 친절하게 재료가 쓰여 있지만 그 재료도 모르기에 별로 도움이 안 됐다.
그 뿐인가 브랜디, 꼬냑, 럼, 보드카, 데낄라, 진(Gin)까지, 세상엔 정말 모르는 술들 천지였다. 노랫 속 가사야 굳이 찾으면서까지 듣진 않았지만 술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노래는 맥락과 느낌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지만 술은 마셔보기 전까진 절대 모르는 거니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지갑에 돈이 들어오는 족족 새로운 술을 찾아 마시러 집 근처의 바(bar)를 찾아다녔다. ‘일단 칵테일을 다 마셔보자’라고 하기엔 종류가 너무 많았다, 칵테일은 넘어가고… ‘제법 폼 나게 위스키를 공부해보자’라기엔 슬프게도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양주(?)답께 위스키도 종류가 너무 많아 섣불리 도전하기 꺼려졌다. 자칫하면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일 테니까.
그 때 눈에 들어온 술이 ‘꼬냑’이었다. 메뉴판에 꼬냑은 ‘헤네시 VSOP’, ‘까뮤 VSOP’, ‘레미 마틴 VSOP’ 이렇게 딱 세 종만 적혀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도전해볼만 하지!
‘꼬냑’은 사실 프랑스의 지역 이름이고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다. 꼬냑(코냐크) 지방에서 만들어진 브랜디가 워낙 훌륭해서 아예 술 이름이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샴페인과 마찬가지로 ‘꼬냑’이라는 이름은 꼬냑 지방에서 만들어진 브랜디에만 붙일 수 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옛날엔 전국 빵집에 스파클링 과실주가 샴페인의 이름을 달고 판매되고 있었는데 이는 저작권(?)문제였고 결국 이름만 샴페인은 모두 사라졌다.
처음 마셔본 꼬냑은 향이 참 좋았다. 캐러멜 같기도 하고 약간의 알콜향은 나지만 무거운 과일향, 거기에 기분 좋은 달콤함이 코를 감쌌다. 혼자 바에 앉아 꼬냑의 향을 즐기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성공한 직장인(?)이 된 느낌이었고, 스스로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역시 술은 마셔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다.
아, 혹시 굳이 찾아보긴 귀찮지만 인센스는 궁금해 할 누군가를 위해 앞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내 궁금증이 풀린 건 망원동의 ‘녹턴사카바’라는 바에서였다. 원래 동생과 내추럴 와인을 마시러 ‘아마’에 가는 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문이 닫혀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와인바를 찾자니 애매해서 무작정 망원동을 걷고 있던 찰나 어디선가 갑자기 이국적인 향내가 코를 찔렀다. 그곳이 ‘녹턴사카바’였다.
옛 멋이 살아있는 가구와 주홍빛 조명이 아름다운 그곳에선 40~60년대의 재즈가 흘러나왔고 한쪽 벽면엔 마찬가지로 오래전 영화들이 조용히 상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독특한 건 향내였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이국적인 향냄새에 난 완전히 반했고 그 이후 망원동에 가면 꼭 그곳에 들르게 되었다. 결국 그 향에 완전히 중독된 난 이제 집에서도 그 이국적인 향을 맡고 싶었고 향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의 바다 속을 몇 번 헤엄치고 나서야 인센스가 피우는 향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 집에선 인도산 인센스가 열심히 이국적인 향을 뿜어내고 있다는 아름다운 결말이다.
혹시 이 글을 다 읽고 꼬냑은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첨언하자면 망원동의 그 바에서 내가 마신 술은 꼬냑이었다. 순 억지라고? 아무렴 어떤가. 술도, 인생도, 노래처럼 대충 느낌(?)이 중요할 때가 있는 거다.
◈ 델리스파이스 5집 ‘Espresso’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아마도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할 ‘고백’이 수록된 앨범이다.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도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나그참파. 키치죠지의 작은 민속악기점에서 피워졌으리라 보는 인도산 인센스다. 적어도 망원동의 녹턴사카바에선 분명 피워졌을 거고 광주에 있는 필자의 방에선 지금도 이 향이 피어오르고 있다. 본인은 인도에 가본적이 없지만 다녀온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정말 인도냄새(?)라고 한다. 혹시 강한 향을 싫어한다면 사는 것을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