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술 칼럼
추억의 먹거리로…
임재철 칼럼니스트
어느 때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많은 시대 상황에서 거리에 사람들마저 쓸쓸해 보이는 초유의 비접촉 시대를 살고 있다. 너 나 없이 힘겹고 불안한 상황, 가족은 말할 것 없이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즐거움도 기쁨도 누릴 수 있는데,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사람들끼리도 술자리마저 피해야 하니 안타깝다.
이 같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모임이나 술좌석에 연연하지 않고 TV 먹방이나 유튜브 채널 등의 음식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방송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누가 뭐래도 지루한 싸움에서 먹는 건강을 통해서 더 힘내고 더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게다. 여기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시골에서 재료를 준비하는 일을 보여준다거나 특히 추억의 음식을 만드는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보게 된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코로나19라는 대재앙으로 사람과의 대면을 기피해야 하는 고통스런 생활을 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부드럽고 담백한 생선살이 입에서 살살 녹는 ‘뜨끈한 탕’ 한 그릇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누구나 딱 요맘때,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대개 기분이 우울할 때 그 음식을 떠올리면 푸근해진다. 즉, 마음에 안정을 주니 ‘위로의 음식’일 거며, 코끝 찡한 기억에 빠져들게 하니 ‘추억의 음식’일 거다.
찬바람이 부는 이맘때면 ‘양미리 구이’가 그립다. 연탄불에 잘 구워진 양미리는 비린내가 나지 않아 참 고소하다. 군대 친구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뼈째 꼭꼭 씹어 먹으면 장수하고 아픈 데가 없을 거야”라고 늘 주창하며 먹곤 했다.
물론 양미리 구이는 술안주였다. 소주 한 잔을 들이켠 후 갓 구운 양미리를 맛나게 먹었던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친구와 함께 군 생활하던 근처의 강원 속초로 여행을 떠나 대포항 인근 포장마차에서 양미리 구이에 소주 한잔하고 싶은데… 그저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눈발이 날릴 때쯤 뜨끈한 아랫목에서 먹었던 도루묵찌개도 그리운 추억의 음식이다. 마리당 600~1000개의 알을 품은 ‘알 반 살 반’인 도루묵은 톡톡 터지는 식감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또렷하다. 끈적끈적한 알에는 비타민과 연골·활액 성분도 들어 있어 건강식으로도 그만이다. 도루묵은 또 연탄불에 구운 것보다 찌개로 먹는 게 더 맛있다. 무를 깔고 알이 가득 밴 도루묵을 올린 후 고추장, 고춧가루를 푼 양념장을 넣고 끓이다 청양고추를 넉넉히 넣으면 얼큰한 맛이 기가 막힌다. 몸밖으로 삐져나온 노란 알들을 국물과 함께 한 숟가락 푹 떠서 먹으면 매콤한 쫄깃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도루묵은 환목어(還木魚)·환맥어(還麥魚)·도로목어(都路木魚)·목어(木魚) 등 한자 이름도 많다. 조선시대에는 은어(銀魚)·은조어(銀條魚)로 불렸다. 선조가 피란길에 맛본 ‘목’이라는 물고기가 너무도 맛있어 하사한 이름이란다. 환궁 후 선조는 은어의 맛을 못 잊어 다시 먹어보았는데 예전 그 맛이 나지 않자 “도로 묵이라 불러라”라고 역정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먹거리일 것이다. 사시사철 제철 재료로 차린 음식을 만나야만 진짜 맛을 만나게 된다. 또 추위를 떨쳐내려고 국수 한 그릇 말아먹거나, 출출할 때 한입 베어 물게 만드는 찐빵이나 도넛은 단순한 말로는 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이왕 군대 얘기가 나왔으니 일반인에게는 낯선 맛스타 음료수, 군인용 건빵, 초코파이 등 추억의 군대 음식들의 모습도 추억을 소환한다. 추억의 군대 음식들을 다시 먹어보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지만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른바 철판 생선구이인 붕어빵, 호떡, 군만두, 국물 떡볶이 등 옛 겨울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먹거리들도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고유의 깊은 맛과 중독성 강한 별미로 여겨진다. 특히 ‘구워 먹는 인절미 꿀 호떡’ ‘네모군만두’ 등 전통을 고수하며 이어져 오고 있는 음식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난롯불 위에 불판을 올려놓고 호떡을 굽거나, 긴 꼬치에 가래떡을 꽂아 구워 주시던 주름진 아줌마의 모습이 재현된다.
‘네모군만두’는 성인손바닥 만한 대형 만두로 호호 불며 먹었던 군만두의 옛 추억과 더불어 눈으로 보는 즐거움까지 더해 주었다. 네모군만두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튀기는 형식으로 구워내면 겉은 바삭 하고 속은 촉촉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 앞 추억 제품은 단연 떡볶이와 라볶이다. 학교 앞 떡볶이 맛집들이 눈에 선하다. 학교 앞 추억의 밀떡 국물 라볶이는 쫄깃하면서도 거기에 라면사리를 넣어 먹었을 때 따듯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호불호가 있기는 하나 필자의 고향인 남쪽 지방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던 청국장을 생각하면 침샘이 끝없이 자극된다. 추운 겨울에 김장김치를 넣고 구수하게 끓인 청국장찌개는 별미였다.
청국장은 삼남 지방에서 만들기 시작해 점차 서울로 퍼졌다고 한다.
청국장(淸國醬)은 전국장(戰國醬)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 병자호란 무렵 청나라 군인의 군량으로 쓰던 장이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는 지적이다.
우리가 도처에서 먹었던 음식은 큰 추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중가요가 그렇듯이 특정한 시간이 떠오르는 그런 음식이다. 그래서 그런 음식을 다시 만난다면 옛날의 그 맛은 아닐지라도 큰 위안이 된다. 길 가다가 우연히 듣게 되는 음악처럼.
말하자면 지나온 시절의 추억 한 자락을 꺼내 보는 것이다. 짜장면, 달걀말이, 수제비, 팥죽, 냉면, 맛탕, 물 국수, 삼겹살, 홍어삽합, 과메기, 우거지국밥 등 우리 모두에게 음식에 따른 추억이 있을 거다. 어려운 시절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먹던 춘궁기의 음식들, 한결 같이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의 한때를 추억하며 아무리 힘들었다 하더라도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것들 말이다.
이런 음식을 생각하며 눈물지으며 부모님을 추억하고, 동네 시장 골목을 떠올리고 안쓰러워하는 것들조차도 다 추억이 되는 것 같다.
추억의 음식 이야기가 길었다. 핵심은 부디 새해엔 모두가 추억과 위로의 음식을 통해 시대적 불안과 공포, 우울을 떨쳐내는 생활 속 힐링의 대안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