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산업과 정책이야기(41)
이스라엘의 음주문화와 알코올정책(2)
조성기(아우르연구소 대표/경제학박사)
일상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스라엘의 알코올 중독은 기원 후 70년에서 국가 설립기인 1948년까지의 삶과 행동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들에게 경건한 기간은 아주 길었다.
이천년에 가깝도록 지속된 디아스포라의 기간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야만 했던 행동들은 실로 뼈를 깎는 고난 속의 일이었다. 그 기간 중에 그들은 알코올의존을 억제하는 사회문화적 전통을 잘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들이 그 기간 동안 큰 곤란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술 이야기를 하면서 노아와 롯의 이야기나 잠언에 적혀있는 ‘만취하는 유태인들’에 대한 기록을 빼 놓을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최근에도 유태인들이 술 마시고 취하는 사건을 계속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기록을 보면 유태인들의 만취현상은 놀랍게도 현인들 사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마취문제가 어딘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덜 떨어진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음주자의 만취문제는 근엄한 유태인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니 청소년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엘리트 층의 음주상황도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술의 문제가 일탈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술 자체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파악해야 대책을 강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파헤치다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술의 위력이 종교도 인종도 넘어서는 예외 없는 현상이란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인간에게 죄를 덮어씌울 일이 아니라 ‘술 자체’에 문제가 분명히 관찰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이다.
1960년대 이후 이스라엘의 알코올중독 현상을 조사해 보자. 그 현상은 서구사회와 다르지 않다. 중독의 연유를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학자들이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연구가 거듭되고 있으므로 중간 결론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것은 디아스포라시기에 볼 수 있었던 유태인의 생활이 오늘날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 시기에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창의성과 유연한 사고를 길러주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식사 전에 토라 기도문을 암송하고, 탈무드도 어김없이 읽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대안을 찾는 능력을 가져 술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도록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 노력은 지금도 상당부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일상적 음주문제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덜 심각한 것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받아들여야할 사실이니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선 음주량 자체가 러시아, 한국, 일본, 다른 선진제국 들보다 매우 적은 것이 확인되지 않는가. 이스라엘의 학자들은 그런 사실을 관찰하면서 일단은 문제에 대해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절대적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항상 노심초사다. 위험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최근의 역학조사 자료들을 보자. 충격적인 결과들이 많다.
유태인들의 음주실태가 다른 서구사회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입장의 글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술의 소비나 문제와 관련된 국제 통계 자료들에 이스라엘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에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는 디아스포라 시기와 너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술에 관한한 일대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통계로 집계되어 제시된 대상국들의 밑바닥이지만 음주의 비교자료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이다. 원래 술 문제가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큰 충격이다. 이스라엘이 ‘술 문제가 있는 국가’라니 말이다. 그 사실은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분명 ‘특종감’이다.
이스라엘의 그런 변화는 또 다른 질문을 야기한다. “디아스포라 시기의 음주규범이 열심히 교육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제 무너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술에는 어느 민족도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 선민인 우리의 정신이 술에 침탈되는 것인가? 우리마저?”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술을 대상으로 인류를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이스라엘에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유태인들도 적정음주가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유태인들이 술에 대해 허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조사되었고 음주자들도 상당수 되는 것은 이미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 수가 늘고 있고 미래 분위기가 더 흉흉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변화에 특히 ‘유태인 율법학자들’이 통탄하고 나서게 된다.
바리새파가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상황은 아주 다르다. 하지만 율법이 일반인에게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 현실이 점점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확실해 지고 있다. 게다가 율법이나 종교가 이스라엘인들의 이 같은 행동변화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다들 놀라게 되었다. 토라 교육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고 선민들도 술앞에 무너지고 있으며, 이제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이제 술 문제를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들이 이스라엘에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고민, 율법학자들의 낙심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복기해 보자.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을 형성하기 전에 영국령 팔레스타인 체제하에서는 유태인들의 알코올 중독문제가 전혀 불거지지 않았었다. 사실 술 문제는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도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술을 적정량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는 유태인들의 이미지와 그것을 결정해주는 사회적 역사적 요인들이 새로운 지역에서의 정착 초기에 잘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70여 개나 되는 국가들에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질적 이주자들이 하나의 국가를 애써 만들어가는 그 어렵던 시기에는 진정 그랬다.
사명감, 개척자 정신, 근면한 공동생활이 필요했던 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적정음주라는 음주규범을 서로 잘 지켰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안정이 되어가자 타향살이 시절 사교적인 음주를 하던 습관은 점차 무시되어갔다. 결국에는 사라져버렸다고 봐야 할 상황이 되고 있다. 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증거를 더 포착해 보자.
1950년대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알코올의존증 환자가 1960년 자료에서는 상당수 발견되기 시작한다. 변화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알코올의존증 치료는 정신병원에서 치료하는 정신과적 치료가 주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배우자들에 대해 재정지원을 하는 프로그램과 자녀들을 의존증 환자의 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프로그램도 보이고 있어 별도의 특별한 노력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로서는 서구에서도 매우 선진적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때 이스라엘의 자료에서 발견되는 과음의 원인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이었다. 첫째 유형은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온 이주자들 중 사회적 지위가 급변한 이들이다.
이주자들 중 북아프리카나 중동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 지역의 음주특성을 반영하여 사교적인 음주를 하는 습관을 지니고 귀국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중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귀국 초기 가졌던 적정음주 습관자에서 병적인 과음자로 바뀌었다. 이주 전 살던 국가에서 가졌던 사회경제적 지위가 변화하자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들 중에 과음자 집단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교육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는 삶의 긴장을 술로 해결하게 된 이들이다. 신생국인 이스라엘에서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이집트 등 적대국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한 긴장에서 탈출하기 위한 이완메커니즘을 술에서 찾은 이들이다. 이들 또한 빠른 속도로 과음자로 변해갔다.
세 번째 과음자 집단은 ‘나치 독일’의 학살에서 생존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사회적 적응이 어려웠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외로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나 좋은 않았던 기억을 잊기 위해 술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들이 알코올의존증을 앓게 된 것이다. 그들이 신보다 술을 선택한 것이다.
1970년대 초반이 되자 이스라엘인들의 음주습관은 더욱 더 변했다.
점차 세속화되고, 풍요는 늘어나고, 새 생활에 동화되어갈수록 중상위층들을 필두로 적정음주가 ‘이상과음자’로 변했다. 비정상음주자가 속출한 것이다. 그러자 과음에 대해 부정적이던 태도조차 크게 변화하였다. 1인당 순 알코올 소비량이 무려 5ℓ에 육박하게 된 것이다. 이 숫자는 우리나라나 유럽을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적은 량이지만 이스라엘로서는 매우 놀랄만한 많은 양이다.
자료를 찾아보면 ‘정기적으로 술을 마시는 집단’도 계속해서 늘어났다. 혼자서 마시는 사람들, 이른바 ‘혼술족’도 늘었다. 우리나라 홈술족, 혼술 족의 원조가 이스라엘에 있었던 것이다. 중상위층 음주자 집단들에게는 음주가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술을 마심으로 해서 자신들이 ‘세계화’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고리타분한 규율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분위기가 점차 공감대를 가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해외여행자들도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 술을 습관적으로 사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음주의 즐거움을 가지고 입국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유태교도가 80%나 되었는데도 그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들이 이제 그렇게 변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은 이제 술을 자연스레 마시고 술 마시는 일을 통해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음주기회의 증대를 삶의 질의 향상으로까지 받아들었다.
그쯤 되자 이스라엘에서의 술은 이제 쾌락의 수단이 되었고 만취를 일삼게 되었다. 당연히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대폭 늘어났다. 1970년대는 이스라엘인들의 생활습관이 크게 변화한 시대였다. 가치와 규범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인정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고고한 이스라엘 사회가 다른 사회처럼 변화해 가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신이 선민들을 방치한 것일까? 선민들이 신을 잊은 것일까?”궁금증이 일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살았던 사회 속에서 고립된 삶을 지속해 왔던 디아스포라 시기와 건국초기의 적정음주는 1970년대에 소멸되었다!”고 선포를 한 셈이었다. 변화라는 큰 물결 속에서 과거의 습관을 지켜내기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음주실태에 관해 몇 가지 자료를 더 찾아보면, 과음에 시달리는 빈도가 늘고 있는 증거를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알코올음료의 1인당 생산과 소비가 그 때 늘었다. 병원 입원자수도 늘었다. 대도시, 중소도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술로 인한 음주환자가 늘었다. 청소년, 여성, 이스라엘 태생의 알코올의존증 환자도 늘어났다. 음주관련 범죄의 증가도 물론이다. 1970년대는 좋지 않은 소식만 계속 늘어나는 시기였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서방의 지원을 얻어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들은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유대인 국가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충돌이 그 시절 지속되었다. 팔레스타인 공동체에 유대인들의 이주와 동시에 이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아랍인들이 대폭 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세워졌지만 분쟁은 계속되었다.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자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이스라엘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지속된 전쟁의 고난은 음주량을 늘리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전국을 대상으로 알코올의존증 역학조사를 한 시기는 1977년이었다. 우리나라 보다 한 20년 정도 빠른 시기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늦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술 문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시도했으니 대응이 빨랐다고 평가해야 옳다. 우리나라는 문제가 경제개발시대 이후 지속되었지만 대응이 매우 늦었다. 술 문제 대응에 관한 한 유태인들이 한민족보다 매우 빨랐다. 코로나 19 백신접종도 세계 최고 비중(54.7%)으로 속도가 빨라 ‘건강우수국’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다음호 계속>
조성기
(趙聖基, Surnggie Cho, PhD. of Economics. MPH.)
한국대학생알코올문제예방협회, 회장
원주한살림, 이사장
살림농산, 대표이사
아우르연구소, 대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