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로 술사지 마라
김원하의 취중진담
‘빈말이 랭수 한 그릇만 못하다’는 북한 속담이 있다. ‘빈말’은 사전적 의미로 실속 없이 헛된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공말, 허설(虛說)이 있다. ‘거짓말’과는 다른 말이다. 북한어로는 ‘속에 없는 말’이라고 조선말 대사전(1992)에 그 뜻이 풀이돼 있다.
‘“제 말을 빈말로 여기지 마십시오.” 용칠이가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투로 투덜거렸으므로 천덕은 빈말로라도 무어라 위로해 줄 농담을 찾던 중이었다.’<홍성암, 큰물로 가는 큰 고기 중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 후 국방백서에 ‘주적(主敵)’ 개념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북한 보도기관들이 일제히 비난과 협박을 쏟아냈다. 민주조선은 “보수패당이 북침전쟁을 도발한다면 우리 군대와 인민이 선군의 기치 밑에 다져온 전쟁 억지력의 위력을 톡톡히 맛보게 될 것”이라며 “그때에 가서 후회할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라고 위협했다.
이처럼 빈말은 여러 경우에 사용한다. 여자들의 인사말 가운데 “어머, 너 엄청 예뻐졌다”처럼 서로의 외모나 스타일, 액세서리 등에 대한 칭찬을 하는 말에서부터 남자들의 “야,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언제 술 한 잔 하자”까지 쓰이는 정도는 다양하다. “우리 언제 소주 한 잔 해야지”, “언제 밥 한 끼 먹어야지” 등의 빈말 문화는 남성 문화의 상징 중 하나다. 그래서 남자들은 서로 아무 거리낌 없이 ‘언제 ~해야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남성의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날 때마다 “선배님, 제가 술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라든가 “언제 시간 좀 내주세요”라고 하는 인사(人士)가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수년 동안 그러기에 “오늘은 어때?”라고 하자,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에 일침을 가했다. “빈말로 술사지 마라!”
문제는 남성들이 바로 이 표현을 여성에게 사용했을 때, 여성들은 착각과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알아야 한다. 남성은 관심 있는 여성에게 말할 때 “우리 언제 소주 한 잔 해야지?” 하는 식으로 ‘언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남성은 관심 있는 여성에게 말을 할 때 “이번 주 금요일에 뭐해? 우리 술 한 잔 할까?” 또는 “이번 토요일에는 뭐해? 영화 볼래?” 하는 식으로 좀 더 정확한 날짜를 정해서 물어본다. 관심 있는 남성이 “언제 소주 한 잔 하자”고 하는지, 아니면 “주말에 술 한 잔 하자”고 하는지 살펴봐라. 그러면 그 남성이 속된 말로 뻐꾸기를 날리는 건지, 혹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좀 더 파악하기 쉬울 것이다.
‘빈말이 랭수 한 그릇만 못하다’는 속담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보다는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말 중에는 거짓말, 참말, 딴말, 같은 말, 빈말(허언), 맹약, 헛소리(틀린 말), 바른말 등이 있고, 우리는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달리 들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요즘 정치인들의 공약이 반드시 실천되도록 선거철에 매니페스토(manifesto) 실천 협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정치인들의 공약은 빈말이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일본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로, ‘혼네’(本音․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와 ‘다테마에’(建前․겉으로 내세우는 말)가 있다. 이를 모르고 일본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낭패를 당하는 외국인들이 많다고 한다. 문화를 모르고 ‘일본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의 빈말이나 일본의 다테마에 같은 말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때도 있다.
자, 이제부터 빈말로 술사지 말자. 그리고 정말 빈말이 아니라면 “빈말이 아니라…”라는 말을 섞지 말자. “그 사람은 빈말할 사람이 아니다”란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