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술 아니고 달랠 길이 있겠는가?

빛나던 가을도 액자 속의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초겨울

『빈 술병』

그래 술 아니고 달랠 길이 있겠는가?

육정균(전국개인택시공제조합이사장/시인/부동산학박사)

 

모처럼 아내의 절친이 찾아와서 캔 맥주 한잔에 이야기가 밤새 이어진다. 술은 우리를 기쁘게 만들기도,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기분 좋게 마신 날에는 한층 기분이 충만 되어 즐거움이 배가 되고, 힘든 일을 털어버리기 위해 마신 날에는 감성에 젖는다.

가끔 우리는 술을 마시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기도 하고, 술김에 용기를 얻어 속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이처럼 술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착한 동반자이니 절친과 함께하는 보배로운 술은 음식 중에 으뜸으로 유용하게 즐기되, 과하게 독으로 먹지 않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 생각된다.

바야흐로 계절은 추풍낙엽으로 점점 추워지는 초겨울인데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정치의 계절에 서 있다. 자고 나면 넘쳐나는 정치 뉴스의 홍수에 거의 익사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우리 세계의 공적인 논의는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1958년 간행된《인간의 조건》이란 책에서 인간의 활동적인 삶을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고대로부터 변화해온 이 활동들을 추적하면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가를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보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인이라는 말은 ‘생존을 위한 필요’로부터 해방된 자를 의미했다.

단풍 속, 낙엽 눈 속에서 꽃피는 아이들의 평화

‘생존을 위한 필요’를 충족하는 것은 동물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 즉 ‘노동’은 인간의 인간성이 아니라 동물성으로 이해되어 자유인의 활동에서 배제됐다. 필요에 의한 활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 그중 영원한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학문적 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최상의 활동으로 간주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활동, 즉 노동과 생산 활동을 사적(私的)인 영역, 즉 가정에서의 삶의 양식으로 유폐시켰다. 사적인 삶은 자신의 필요로 움직이는 활동 공간으로서 ‘진정한’ 삶인 공적(公的) 삶, 즉 폴리스의 작동인 정치적 삶이 결여된 영역이다. 이들에게 ‘사적(private)’이라는 말은 진정한 삶인 공적인 것의 ‘결여(privation)’ 혹은 박탈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세계는 사적인 삶이 공적인 영역에 의해 압도된 상황이었다.

아렌트에 의하면 현대는 고대에 사적 영역으로 유폐됐던 이 두 활동, 즉 노동과 작업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런데 이 말은 역으로 생각하면, 고대에 중요한 인간적 삶의 활동이었던 정치적 행위가 그 의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노동은 중요한 활동 양식으로 격상되고, 이와 함께 노동은 현대에 이르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자기실현 행위 양식이 된다. 로크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노동가치설은 인간의 활동과 사적 소유를 설명하는 핵심 이론이었다. 아렌트는 노동을 중심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데, 아렌트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가 마르크스의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을 비판하는 저술을 준비하다가, 그것을 중지하고 그 내용을 녹여낸 것이《인간의 조건》의 제3장이라고 한다. 노동이 인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과대평가한 측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노동의 개념으로 환원해 설명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마르크스의 노동 중심의 비판적 관점으로 인간의 활동을 그 일의 성격과 대상물 그리고 활동의 산물 등을 고려해 다른 성격을 가진 활동들, 즉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로 범주화했다. ‘노동’은 생명체를 보존하기 위한 활동으로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듯 인간 신체의 자연적,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며, 자연 대상의 가공을 통한 직접적 소비를 지향하는 활동이다.

일상이 회복된 시민들의 환호성

‘작업’은 인간 실존의 비자연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내면을 외현화(外現化)하며. 작업은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도구나 예술작품을 산출하여 인간적 세계 형성의 문명과 문화의 토대가 되는 활동이다. 노동은 인간의 자연적 활동이고, 작업은 신(神)의 창조적 활동처럼 인간의 신적 특성의 활동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만 고유한 활동을 아렌트는 정치적 ‘행위’라고 했다. 다수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인 정치적 행위는 인간적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양식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런 다양한 성격의 활동이 모두 노동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실을 문제로 보았다.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 더구나 지금의 AI 4차산업혁명시대 인간화된 로봇과 IT플랫폼기술과 시스템은 결국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간의 노동 사회에서 모든 것이 노동의 산물로 소비되고, 노동을 통한 삶의 유지에 급급한 상황에서 노동단체의 연대로 강력한 정치권력으로 성장한 노동 중심의 사회를 “짧은 노동으로 고수익을 얻고, 긴 노동 대신 긴 시간의 휴식, 운동, 여행 등으로 삶의 여유와 즐거움이 넘쳐 인간의 진정한 삶이 펼쳐지는 일반화된 소비 사회”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아렌트가 주목하는 근대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온 노동의 지나친 강조에 대한 비판의 중요한 지점이다.

원초적 노동도 결국 돈과 권력을 지향하고, 자원동원이론(Resource mobilization theory)에 입각하면 돈이 결국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정치권력을 쥐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므로 그놈의 돈이 모든 것을 우선하여 엮인 작금의 한국 사회를 술 아니고 달랠 길이 있겠는가?

* 육정균 : 충남 당진 出生, 2000년 작가넷 공모시 당선, 2002년 현대시문학 신인상(詩), 2004년 개인시집「아름다운 귀향」출간, 2005년 현대인 신인상(小說), 부동산학박사, (전) 국토교통부(39년 근무) 대전지방국토관리청 관리국장(부이사관). 현 개인택시공제조합이사장, 단국대학교 부동산건설대학원 겸임교수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