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식도락
임재철 칼럼니스트
연일 폭염이 극성이다. 밤에는 열대야까지 한창이다. 요즘, 세계적으로도 이상 고온 현상이 잇달아 발생하는 걸 보고 있자니 기후 위기가 피부로 다가온다. 지구가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치는 것 같다. 불쾌지수도 함께 높아진다. 그 불쾌지수를 더 높이는 게 있으니 바로 국민들이 걸었던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현 정권이다. 여하튼 숙면을 못한 탓인지 모든 게 힘들다. 입맛조차 없다.
누구나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때다. 최근 치과를 비롯, 여러 병원을 드나드는 필자로서는 뭔가 입맛 돌게 하는 뭐가 없을까 하는 고민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여 여름 들어 지난 몇 주 동안 다닌 모임 장소나 식당 중 좋았던 곳을 모아 볼까 한다.
앤데믹 이후 사람들의 직접 만남이 이어지던 저번 장마철에 모 언론사 선후배들과 간 곳이 광장시장 ‘은성횟집’이다. 예전 유명 낚시꾼들이 제공한 신선한 회를 팔기도 했던 이 집이었으나 지금은 줄서서 먹는 대구매운탕 집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함께한 동료들과 간만에 알 고니가 듬뿍든 매운탕과 함께 달달한 음주를 곁들여 행복하게 먹었다. 은성횟집의 대구매운탕 국물을 한입 먹는 순간 다 잊혀졌던 기억을 더듬는 얼칼함을 만끽하기도 했다.
행복이란 가장 작은 것에서 만난다. 올 여름 휴가여행 수요가 높아지는 가운데 누군가는 좋은 여행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누군가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가족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며 행복한 여름을 보낼 것이다.
보양식이라면 좀 그렇고 올여름 먹은 밥 중 맛있었던 곳 중 또 한곳은 사당동 훠궈(중국식 샤부샤부)전문점인 ‘구구향훠궈(久久香火锅)’다. 중국에서 먹었던 것보다는 덜 매콤하지만 평소 훠궈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마음에 드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달 자리를 함께 한 일행들은 저보다 연배가 된 이들이라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너무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뷔페라 하더라도 깔끔하고 양고기 등 상태가 좋아서 필자가 들고 간 고량주 두병이 남아 나질 않았다. 게다가 여주인의 ‘무한 리필’이니 마음껏 드시란 소리가 정겹다 못해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 곳에서 올 가을 산동성 태산에 가서 제대로 된 훠궈를 먹기로 했으니 또 그 맛은 어떨지 기대된다.
그리고 얼마 전 점심식사 약속이 있어 종로 피맛골에 들어선 르메이에르빌딩 1층에 있는 메밀면 식당 ‘광화문 미진’을 갔는데, 예상대로 복도 코너를 꺾어서 길게 늘어선 장사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야흐로 평양냉면·메밀 소바·메밀 막국수 등 유난히 메밀을 더 찾는 여름이 온 것이다. 기다림을 감내하며 그래도 오랜만에 메밀 맛을 보았다.
말하자면 여름 보양식이라고 하면 필자의 고향 언저리로 가면 풍부하다. 영양이 풍부한 낙지와 전복을 삼계탕에 넣어서 주는 것부터, 홍어, 민어 요리 등 그러니까 바다에서 가장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비롯, 각종 소고기 및 흑염소 요리 등 넉넉한 편이다.
언제부터인가 민어가 여름철 보양식으로 알려지면서 그 가격 또한 만만치가 않지만, 목포에 가면 민어 상차림이 참 단출하지만 일품이다. 가령 맛보기 부레와 민어껍질도 참 별미다. 냄비에 끓여낸 기름이 동동 뜬 민어탕의 맛은 단연 최고다. 기름지고 고소한 맛이 압권이다.
헌데 요즈음 맛집의 가격이 심하게 올랐다. 소비자물가가 전반적으로 가파르게 오른 탓이다. 그래서 더운 식객의 상념이 깊어 졌다. 그러면서 뜬금없거나 사치일 수 있겠지만 오래된 친구들, 선후배들, 아껴 주고 싶은 지인들과 무더운 여름뿐만 아니라 계절별로 호사를 누렸던 냉면집이며 국수집 선술집 등이 소환된다. 지난 달 말 마지막 영업을 끝으로 37년 전통의 마지막 ‘을지로 시대’를 함께한 ‘을지면옥’의 시원한 냉면을 건너뛰어 아쉬움이 가득하다.
음식은 사람의 인연을 이어주는 더없이 좋은 매개체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은 밥상을 가운데 두고 간담상조하기를 선호했다. 음식은 술과 밥이다. 이를 함께 나누면 식구다. 그래서 식사로 인연을 맺은 사람은 식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식도락은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짧지 않은 지난 삶을 돌아보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단연 국내외 여행과 그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음식이다. 파리에서 와인에 취해 숙소를 못 찾고 헤매던 그 시절과 멕시코에서 데킬라 마시고 택시 잘못 타 가슴 서늘한 기억까지 인생 화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기도 하지만, 매일 아침 초딩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워딩 하나를 소개한다.
‘아끼지 마라/ 좋은 음식 다음에 먹겠다고/ 냉동실에 고이 모셔 두지 마라/ 어차피 냉동식품 되면/ 싱싱함도 사라지고 맛도 변한다/ 맛있는 것부터 먹어라/ 좋은 것부터 사용하라/ 비싸고 귀한 거/ 아껴 뒀다 나중에 쓰겠다고/ 애지중지하지 마라/ 유행도 지나고 취향도 바뀌어/ 몇 번 못 쓰고 버리는/ 고물이 된다/ 특별한 날 기다리지 마라/ 그런 날은 고작 일 년에 몇 번이다/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은 내 맘에 달렸다/ 오늘이 가장 소중한 날이다/때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흰머리 가득해지고/ 건강 잃고 아프면 나만 서럽다/ 할 수 있으면/ 마음먹었을 때 바로 실행하라/ 언제나 기회가 있고/ 기다려 줄 거 같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지 마라/ 너무 멀리 보다가/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조미하 ‘결정했어 행복하기로’ 중>
코로나 대유행을 겪으며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모임’은 지난한 시간을 거쳐 여전히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2명, 4명, 8명 등 모임의 제한 안에서 우리는 여러 대안을 통해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왔고, 앞으로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모임을 이어 나갈 것이다. 즉 대면과 숨결을 직접 나누는 만남이 일상화되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다.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시원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니 더위가 가신다. 아무리 더운 여름도 금방 지나가리라 생각되지만, 그동안 쌓인 경험 치로 매년 다가올 더위를 예측하는 일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저렇게 지나온 여름날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끼 식사를 위해, 자식들의 여름 보양을 위해 흘린 땀의 무게, 즉 엄마의 그 손맛이 참으로 그립다. 종손의 대식구인 우리 집은 여름이면 백숙과 맷돌로 갈아 만든 장어탕을 자주 먹었다. 엄마는 젓가락질 한번 안 하시며 가족들에게 ‘어서 먹어라’라며 채근했던 기억이 너무 그립고 한편으론 서글프다. 엄마에게 맛있는 삼계탕이나 장어탕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데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멀리 계시니 아프다.
도시는 화가 날 대로 난 모습을 하고 이글거린다. 그나마 짙어진 녹음의 나뭇잎들이 보여주는 청량함과 가끔 그들을 흔들고 가는 고마운 바람 한 줄기라도 없었으면 어쩔까 싶다. 우리의 기분과 무기력을 좌지우지하는 건 큰 무언가가 아니다. 무더위에 입맛이 도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겠냐마는 여름을 이기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이라도 챙겨 먹어가며 맞서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