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30)
노아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곧 물러갔다. 그리고 당장 ‘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를 죽였다. 그리고 네 동물의 피를 받아가지고 포도원으로 다시 왔다. 그리고 좋은 포도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거름이 된다고 말하면서 포도나무에 4마리 동물들의 피를 부었다. 그런 결과로 태어난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마다 네 가지 동물의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포도주가 빨간색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는 양같이 온순한 사람이 포도주를 조금 마시고 나면 사자같이 으르렁거리며 강해진다(If he drinks two glasses of wine, he feels as strong as a lion). 조금 더 마시고 나면 돼지처럼 지저분하여 진다. 행동은 물론 말도 더러워지기 시작한다. 절제하지 못 하고 더 마시면 원숭이 같아진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여야 정당한 지도 모르고 원숭이처럼 방황하게 된다(If he drinks three or four glasses, then he behaves like a monkey). 마침내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 때문에 포도주를 마실 경우 ‘양(순해지고)→ 사자(사나워지고)→ 돼지(더러워지는)→ 원숭이(춤추고 노래하고)’의 4단계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한국식 가라오케는 취태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명한 적절한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단계적 취중행태를 일컬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술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악마이고, 달콤한 독약이며, 기분 좋은 죄악이다.”라고 하였다.
‘위대한 연구’라는 뜻을 지닌 유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서인 <탈무드(Talmud)>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디오니소스가 아니고 ‘노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선 두 번째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게 전개된다. “이 세상에 최초의 인간이 포도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 때 악마가 찾아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놀라운 식물을 심고 있지.” 하고 대답하자, 악마가 “이거 처음 보는 식물인데?”하고 말했다.
그래서 인간은 악마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 식물에는 아주 달고 맛있는 열매가 달린 다구. 그래서 그 국물을 마시면 아주 행복해진다구.” 그러자 악마는 자기도 꼭 동업자로 넣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양과 사자와 원숭이와 돼지’를 끌고 와서, 그것들을 죽여 그 피를 거름으로 부었다. 포도주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술을 마시면 먼저 ‘양처럼 유순해지고’,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난폭해지며’, 더 마시게 되면 ‘원숭이처럼 춤을 추어대고 노래를 부르게 되며 시끄럽게 되고, 더 마시게 되면 ‘돼지처럼 지저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서는 “이는 악마가 4가지 동물의 피를 취해 인간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의 버전과는 돼지와 원숭이의 순서가 뒤바꿔 있다. 취태의 마지막이 깨끗하게 끝날 일이 아니기에 마지막에 순차한 것이지 모를 일이다. 신이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던 노아도 이렇게 되었는데 보통 사람이 마시면 어떻게 될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맥주와 위스키의 재료가 된 밀(또는 보리)에 대한 국내 전승에서는 이렇다. 최초의 밀을 심을 때 “사람 셋을 죽여서 그 간을 거름으로 주라”는 신탁을 받은 농부가 언덕에서 낫을 들고 이들을 기다렸는데, 처음 나타난 것은 ‘선비’였고, 다음에 나타난 것은 ‘중’이었고, 마지막 나타난 것은 ‘미치광이’였다. 농부는 그 셋을 차례로 죽여 배를 째서 간을 꺼내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길러진 것이 밀(또는 보리)이어서 배를 짼 자국이 세로선으로 남아있고, 그것으로 술을 빚으면 죽은 세 사람이 차례로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비처럼 점잖다가 다음에는 중이 부처님 앞에 공양하듯 자꾸 남들에게 권하고, 마지막으로는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스님 대신 ‘광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광대’처럼 떠들고 노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1937)에서 나오는 일화는 병에 걸린 사람이 의원에게 세 사람의 간을 먹으라고 처방을 받아서 ‘선비, 중, 미치광’이 순으로 죽이고 간을 먹고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세 사람을 묻어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자라난 게 보리라고 얘기하고 있다. 보리 가운데에 생긴 금은 세 사람의 배를 가른 흔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상기의 모든 예들은 알코올을 취할 정도로 음용한 후에 나타난 취태(醉態)를 반영한 교훈적 의미를 지닌다.
하여튼 포도나무의 기원은 디오니소스의 절친한 친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어린 시절 디오니소스는 여러 무리의 소녀들과 춤을 추며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 친구 중에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켄타우로스(Centaurus)인 암펠로스(Ampelos, 포도밭)가 있었다. 이 괴물은 머리에서 허리까지는 인간이고, 나머지는 말(馬)의 몸을 하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말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말과 인간의 결합체를 과히 천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인마일치라는 말도 있다. 따라서 켄타우로스는 고대의 공상적인 괴물 중 가장 훌륭한 특성을 부여받은 유일한 괴물이었다.
이 켄타우로스는 인간과의 교제가 허용돼 있었기 때문에 페리토오스(Peirithoos)와 히포다메이아(Hippodamia)가 결혼할 때에도 다른 손님과 함께 초대 되었다. 그 잔치 때 켄타우로스족의 한 사람인 에우리티온(Eurytion)이 술에 만취되어 신부에게 폭행을 가하려 했다. 그러자 다른 켄타우로스들도 그의 행동을 뒤따라 폭행을 하려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의 싸움’으로, 고대의 조각가와 시인들이 즐겨 다룬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켄타우로스가 페리토오스의 난폭한 손님 같지는 않았다. ‘케이론(Cheiron)’이라는 켄타우로스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수렵, 의술, 음악, 예언술에 능하기로 유명했다. 그리스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영웅들(Herakles, Aesculapius, Iason, Dioskouroi)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특히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는 어릴 적에 그의 아버지 아폴론에 의해서 그의 가르침을 받도록 위촉되었다. 케이론이 어린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딸 오키로이가 마중을 나와 어린애를 보고 갑자기 예언자의 어조로(그녀는 예언자였다) 이 아이가 장차 성취할 영광을 예언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성장하자,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한 번은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일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명부의 신 하데스는 이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제우스는 그의 소원에 따라 이 대단한 의사에게 벼락을 내려 죽여 버렸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그를 신들의 축에 끼게 해주었다. 케이론은 모든 켄타우로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공정한 자였으므로 제우스는 그가 죽은 후에 ‘인마궁(人馬宮)’이라는 별자리 가운데에다 그를 올려놓았다.
디오니소스는 생명의 나무인 포도나무를 의미하는 그의 아들 암펠로스(Ampelos)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한번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짐승들을 겁낼 필요는 전혀 없지만, 성난 숫소의 뿔만은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어느 날 홀로 있던 디오니소스는 불길한 징조를 예언하는 듯 한 광경을 목격했다. 뿔 달린 용 한 마리가 바위틈에서 나타났다. 용의 등에는 사슴 한 마리가 올라타고 있었다. 용은 그 사슴을 돌 제단에 떨어뜨려 놓더니 무방비 상태에 있는 작은 사슴의 몸에 자기 뿔을 찔러댔다. 돌 위에는 핏물이 샘처럼 고였다. 디오니소스는 그 광경을 보면서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 그의 가슴이 두 개로 갈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웃음이 그 고통과 뒤섞여버리는 것이었다.
암펠로스는 갈대 피리를 즐겨 불었는데 연주 솜씨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끊임없이 그를 칭찬했다. 칭찬하는 동안 그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펠로스는 가끔 소에 관한 디오니소스의 경고를 떠올리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이미 짐승들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숫소를 피해야 하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외출한 암펠로스는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서 숫소 한 마리를 만났다.
숫소는 갈증이 나서 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암펠로스는 숫소의 뿔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는 갈대로 채찍과 고삐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더러워진 가죽을 숫소 등에 올려놓고 그 위에 올라탓다. 하지만 질투심 많은 헤라는 그 광경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다가 등에 한 마리를 숫소에게 보냈다. 화가 난 숫소는 얄밉게 괴롭히는 등에를 피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암펠로스는 더 이상 숫소를 제어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먼지와 피로 뒤범벅이 된 암펠로스를 발견했다. 그래도 암펠로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를 에워싼 반인반마의 괴물 실레니(Sileni)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그들과 함께 슬픔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불멸의 신이기 때문에 암펠로스를 따라 하데스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튀르소스로 숫소란 숫소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털복숭이의 실레노스로 변신한 에로스가 그에게 다가와서 위로했다. 에로스는 사랑의 괴로움은 새로운 사랑의 고통으로써만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랑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꽃 한 송이가 꺾이면 정원사는 또 다른 꽃을 심는다. 하지만 지금 디오니소스는 암펠로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것은 그의 성격과 세계의 성격을 변화시킬 징후를 보이는 사건이었다. 이때 시간의 여신 호라이(Horai)는 서둘러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것은 천상의 바퀴 위에서 벌어지게 될 새로운 사건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이제 목신(牧神) 판(Pan)에 조언을 구할 시간이 되었다. 그 목신 판은 태초의 빛나는 자 파네스(Phanes)의 손이 세계의 사건들을 순서에 따라 조각해 놓은 것이었다. 헬리오스는 벽에 걸어놓은 목판들을 가리켰다. 호라이는 네 번째 목판을 살펴보았다. 그 목판에는 사자와 처녀와 술잔을 든 가니메데스(Ganymedes)가 새겨져 있었다. 호라이와 헬레오스는 그 목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읽어냈다. 암펠로스는 포도나무가 될 것이다.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 디오니소스에게 눈물을 가져다준 암펠로스는 이 세상에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디오니소스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암펠로스의 몸에서 자란 포도가 익자 디오니소스는 맨 처음 열린 포도송이를 따서 아주 익숙한 솜씨로 즙을 짜내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손가락을 바라보다 그 손가락들을 핥았다. 그는 생각했다. 암펠로스, 네 종말은 네 육체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보여주는구나. 죽어서도 너는 네 장밋빛을 잃지 않는구나. 아테나의 소박한 올리브나무도, 데메테르의 영양가 많은 곡물도ㅡ 다른 신의 그 어떤 것도 이 술과 맞먹는 힘을 지닐 수 없었다. 삶이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삶이 기다리는 것은 만취,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암펠로스와 디오니소스 둘은 종종 사냥을 나가거나 달리기나 씨름으로 실력을 겨루곤 하였다. 어느 날 암펠로스가 황소를 잡으려고 잘못 올라탔다가 황소에 끌려 다니다가 죽고 말았다. 친구를 잃은 디오니소스가 슬픔에 잠겼다. 헐벗은 무덤이 추워 보였는지 암펠로스의 무덤을 포도나무로 덮어 주었다. 그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암펠로스를 기리는 운동시합을 하던 디오니소스가 무덤가에서 다 익은 포도를 맛보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먹었던 어떤 포도보다 달콤하고 과즙이 많았다. 그는 포도즙을 여러 개의 컵에 모아두었다가 그만 깜빡 잊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잊고 있었던 포도즙을 맛보니 맛이 완전히 변해 있는게 아닌가. 달콤한 맛은 전보다 못했지만 대신 마시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해서 암펠로스는 포도나무를 뜻하게 되었고, 서정 시인인 핀다르(Pindar)가 포도주를 ‘암펠로스의 아이(child of Ampelos)’라는 말을 쓴 이후로 포도주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사랑하는 자식이자 친구의 죽음이 인간들에게 영원성을 부여했으니 이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디오니소스의 첫사랑은 암펠로스(Ampleos)라는 소년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또한 디오니소스가 에리고네(Erigone)를 유혹하기 위해서 포도송이로 변신을 했었다. 그녀는 이카리아에 있는 아티카 시의 영웅 이카리오스(Ikarios)의 딸이다. 그리스 12신중이 하나인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인간으로 변해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테네 인근의 할리모우스(Halimous)라는 마을을 들러 과일농장 주인인 이카리오스가 그를 환대하여 그의 집에서 유숙을 했다. 이카리오스는 에리고네(Erigone)라는 어여쁜 딸과 마이라(Maira)라는 강아지를 키우고 소탈하게 사는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나그네인 디오니소스를 잘 접대해주었다. 디오니소스는 보답으로 그에게 포도나무를 선물하고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와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음과 부활인데 이는 포도나무에서 비롯된 이미지이다. 포도나무는 겨울이 되면 잎이 지고 밑동이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다가 봄이 되면 극적으로 부활한다. 이집트의 매장 풍습을 담은 벽화에서도 포도나무는 부활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순환과정을 반복하는 수많은 나무 중에서 왜 포도나무에만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모태였던 덩굴이 죽더라도 열매는 와인이나 건포도의 형태로 남기 때문은 아닐까? 이뿐만 아니라 와인은 남녀 관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산(多產)의 상징이기도 했다. 수천 년 동안 찬사와 비난의 대상이었던 와인과 섹스의 결합도 알고 보면 다산의 상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절을 만든 신은 제우스지만, 그 계절을 계절답게 만든 신은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사람들이 거리를 누빌 때는 남성의 생식기와 비슷한 남근상 ‘팔루스(Phallos)’를 앞세우고 다녔다. 그의 별명이 바쿠스인데, 그 뜻이 ‘싹’이다. 씨앗이 땅에서 제 몸을 썩혀 싹을 내어 자라고 열매를 맺어 다시 땅에 들어 부활하는 ‘변화’의 상징이 아닌가? 디오니소스는 계절의 신이요, 곡식과 과일의 신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빚은 술의 신이다. 그 술을 마시고 부리는 광기는 열광적인 강신(降神) 상태이자, 질서에 대한 혼돈의 표현이다. 그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의식이다. 그를 통
해서 디오니소스는 썩어서 다시 생명을 탄생시키는 밀알의 신으로서 땅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리스 이티카시에서는 ‘디오니소스 小祭’, 혹은 ‘시골제’라 하여 12월에 신에게 포도주를 바치는 포도주제가 진행되며, 2월 말에는 지난해에 담근 술을 처음 맛보는 꽃놀이 축제가 있어 3일간 노래와 춤으로 남녀노소가 즐기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또한 3월초에는 ‘디오니소스 대제’가 있어 5일간 연극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진다. 그리스 고전극이 발달한 것은 이 행사의 덕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희생과 부활, 그리고 죽음과 새 생명(와인은 예수의 피와 동일시되었다)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포도나무와 와인에 대한 비유는 <구약성서>에서도 여러번 등장하며 기독교의 텍스트에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예수는 가나의 혼례식에서 물로 와인을 만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고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요한복음 15장 1절)”라고 말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주님의 아들이 흘린 피였다. “마침내 주께서 잔에 와인을 따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뒤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이니라(마가복음 14장 24절).” 와인의 이미지는 중세 예술품에 자주 표현되는 성 보나방튀르(Saint-Bonaventure)의 『신비로운 포도 압착기』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주께서 십자가에 짓눌려 마치 압착기에 눌린 포도송이처럼 피와 땀을 쏟아내시니, 그것이 모든 병자들을 치유하는 약이 되었다.’
고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수도사들은 성찬예식에서 빠질 수 없는 와인과 포도나무를 애지중지했다. 12세기 로마 교회는 성찬예식을 위한 모든 와인을 사제들만 관리할 수 있도록 하여 신자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며, 비잔틴 교회에서만 성직자와 신도가 공동으로 와인과 포도나무를 관리하였다.
포도나무는 해마다 싹을 틔워 곡식처럼 일일이 열매를 맺고 수확이 끝나면 말라 비틀어져 죽었다가, 다음 해에 씨앗이 다시 대지를 뚫고 나오면 또 알알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생식과 재생의 식물이다. 이러한 포도나무와 연관되어 디오니소스는 농경과 풍요의 신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비주의 종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신으로, 그는 엘레우시스 비교(秘敎) 의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자신의 종교와 축제(바카날리아)를 가지고 있었다.
디오니소스의 신도들(마이나데스)은 포도주를 통하여 영적으로 재탄생하는 체험을 통해 신적 지복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 포도주의 신에 대한 의식은 열광적인 입신 상태를 수반하는 것으로, 특히 여성들이 담쟁이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면서 난무하고, 짐승을 때려죽이는 등 광란적인 의식이었다. 이러한 제례에서 연극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연극의 창시자이자 수호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폴로 신이 대표하는 ‘이성’ 및 ‘빛’의 측면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과잉, 부절제, 난폭함’을 상징하는 신이며, 한편으로는 이런 요소들이 인간의 내적 변화에서 가지는 가치와 의미, 잠재력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그의 어머니가 인간이므로 인간의 고뇌와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신이기도 하다.
특히 디오니소스는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가져오며, 죽음에서 재생하는 신으로 이해되는데, 이런 부분 때문에 비교에서 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말하자면, 디오니소스는 거대한 흐름을 가진, 미분화된 생명력 그 자체를 상징하며, 또한,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고, 무수한 형태를 낳으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 자연의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신이라 할 수 있다.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음주문화칼럼니스트
◇ 음주관련 저작리스트:▴비틀거리는 술잔, 휘청거리는 술꾼이야기(1998)▴주당별곡
(1999)▴술술술, 주당들의 풍류세계(2001)▴알코올의 야누스적 문화(2002)▴음주의 유혹, 금주의 미혹(2005)▴주당들의 명정과 풍류(2007)▴홀 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2009)▴술잔의 미학과 해학(2013)▴은자의 명정과 청담세계(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