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서민의 벗 소주, 어디서 온 술인가
이제 술은 희로애락(喜怒哀樂)에 관계없이 음료수를 마시듯 그냥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중에서도 소주는 ‘국민주’라고 할 만큼 대표적인 술이 됐다. 퇴근길의 소주 한 잔은 피로와 시름을 일거에 털어버리는 묘약이어선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주를 청한다. 이제 외국인의 입에서도 “여기 소주 하나 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가 됐다.
시인이며 영문학자였던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8∼1961) 선생은〈명정(酩酊) 40년〉에서 ‘나의 음주변’을 통해 “기호물이니 그저 마시는 것이다. 음주에 대하여 이유를 붙이는 것…청명하니 한 잔, 날씨 궂으니 한 잔, 꽃이 피었으니 한 잔, 마음이 울적하니 한 잔, 기분이 창쾌(暢快)하니 또 한 잔 등등의 구차스러운 변명이나 이유를 붙이는 것은 자고유지(自古有之)나 엄밀히 말한다면 그네들은 정통주도(正統酒徒)나 순수주배(純粹酒輩)는 아닐지 모른다”고 일갈했다.
진정한 주당은 이유 같은 것조차 없이 술 마실 수 있으면 그저 마신다고나 할까. 변영로는 ‘주도유단(酒道有段)’을 발표한 조지훈(趙芝薰)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주류계의 대부(大父)들이었다. 이들에게 ‘주선(酒仙)’이란 칭호가 붙은 것은 진정한 주당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주선급에 속한 이들이야 주종불사(酒種不辭)였겠지만 그들 역시 처음은 대게 소주로 시작했다고 한다. 소주는 예나 지금이나 역시 서민들의 술이다.
포장마차나 술집에서 주당들은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카~, 쥑인다, 쥑여!”를 연발한다. 이들이 주사(酒肆)에 모이기 전에는 “어이, 이따 쐬주 한 잔 어때?” 하는 모의를 했을 터이고, 흥분된 마음으로 모여들어 권커니 잣커니 한다. 이들이 기꺼이 모의에 참석한 이유는 투명한 소주잔에 출렁대는 그 투명한 액체의 짜릿한 쾌감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소주 없이는 못 살아!” 하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주사(酒邪)를 부릴 때쯤 누군가 “야! 이 소주가 어느 나라 술인지 알아?”하고 묻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우리꺼 아니겠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잘라 말하면 시비가 붙게 될까?
술 마실 때 그런 것 따져가면서 마시진 않겠지만, 원래 소주는 지금의 이라크에서 빚어 마셨던 증류주였다.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는 기원전 3000년 전의 수메르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처음 만들어져 이곳을 중심으로 줄곧 전승돼 왔다. 이런 소주가 어느 날부턴가 탁주, 청주와 더불어 한국의 3대 토속주로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이다.
소주라는 말은 ‘태워서 얻은 술’이라는 의미다. 옛 문헌에는 ‘燒酒’라고 썼는데, 일제 강점기시절을 거치며 ‘술 주(酒)’자 대신 ‘소주 주(酎)’자를 써서 ‘燒酎’로 바뀌었다.
아랍지역에서 즐겨 마시던 소주가 동쪽 끝 멀고 먼 한반도에까지 전해진 것은 고려 충렬왕 때다. 당시 몽고군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몽고군의 주둔지였던 안동과 개성,제주도에선 이 소주 제조법이 발달했으며, 최근까지도 그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몽골군은 1258년에 압바스조의 이슬람제국을 공략할 당시 현지 농경민 무슬림에게서 소주 양조법을 처음 배웠다. 그 후 몽골군의 말과 수레에는 가죽 술통이 실리게 됐고, 이 소주는 몽골군이 가는 곳마다 애호가들을 만들어나갔다.
몽골군은 물러갔지만 고려사회에선 소주가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들이 남긴 문화는 토속의 향취로 옷을 바꿔 입으며 생활 속에 정착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사랑 받아 약용 고급주로 쓰였다. 독하면서도 정갈한 소주의 맛에 궁중과 양반들이 푹 빠져버린 것이다.
증류식소주 시대에서 희석식소주로 넘어온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35도가 넘는 증류식소주에 물을 타서 알코올 도수를 낮춘 게 바로 희석식소주다. 이로써 도수(度數)가 지금처럼 낮아졌고, 왕실과 양반의 술에서 서민의 술로 바뀌었다. 때문에 소주가 우리 전통주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전통주든 아니든 마시고 취하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