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서 술을 찾는 도연명은 진정한 애주가인가

 

꽃에서 술을 찾는 도연명은 진정한 애주가인가

 

 

박정근(문학박사, 극작가, 소설가, 칼럼니스트)

 

 

박정근 교수

11월이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국화향기가 흘러나온다. 가을의 상징적인 꽃으로 알려져 있는 국화는 어쩐지 원숙한 여인의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서정주는 국화를 ‘누님 같은 꽃’이라고 불렀나보다. 세상의 쓴맛 단맛 다 보고 이제 인생을 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나이의 여인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연명은 국화의 아름다움에 끌려 꽃을 따서 술잔에 띄워본다. 사실 술맛이 달리질 리가 없지만 어쩐지 더 끌리는 느낌을 받는다. 무슨 까닭일까. 술잔을 바라보니 가을의 여인인 국화꽃잎이 둥둥 떠있다. 그녀는 도연명에게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윽한 향기를 풍기면서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도연명은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에게 현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 흔히 미녀가 술잔을 권하면 남성들에게 속된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룸살롱을 비롯해서 음습한 술집에서 야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술을 건네면 사내들은 색욕이 발동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는 노래와 춤을 마음껏 즐긴다. 술을 권하는 여인에게도 어떤 도의적이거나 미학적인 가치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욕망을 풀어내는 기계처럼 정제되지 못한 언행을 동원해서 쌓여있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순간 도연명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월적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도연명이 <음주(飮酒)>에서 보여주는 꽃잎의 여인 이미지는 현대의 야한 여인들과는 완전하게 다르다. 욕망을 부추기기 보다는 욕망을 정제해서 세속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인과 술과 꽃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다. 서로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감정을 공유하며 작용을 한다. 시인은 꽃의 색조에 반하여 술을 마시니 시인은 관조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秋菊有佳色, 가을 국화의 아름다운 색조에 끌려

裛露掇其英. 이슬을 머금은 꽃을 따노라

汎此忘憂物, 이 술에 띄워 마시니 근심이 사라지고

遠我遺世情. 나의 속물적 감정이 사라지는구나

一觴雖獨進, 비록 한 잔 술을 홀로 마신다마는

杯盡壺自傾. 술잔을 비우면 술병이 절로 기우노라

 

도연명이 보여주는 신기한 현상은 다음 단계에서 벌어진다. 가난한 시인의 술자리에 누가 함께 합석해서 술을 따르겠는가.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인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누군가 술을 따른다. 아마도 국화꽃을 따서 띄운 술잔에 누님 같은 여인이 시인의 상상 속에 나타나 술을 따르는 환상을 보았으리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눈을 감고 그 여인의 체취를 황홀하게 맛보며 시인의 한 잔의 술을 기울인다. 그 순간 술잔에 떠있던 국화꽃이 여인으로 변신하여 시인 옆에 소리 없이 앉아있는 것이다.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그녀는 술에 목마른 시인에게 술을 따르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순간에 술꾼인 시인에게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룸살롱에서 술을 따르는 야한 여인이 아니라 반인반신과 같은 존재로 다가왔으리라. 이런 초월적 존재와 같이 영원히 함께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은 시인에게 항상 번뇌를 가져다주는 혐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세상의 모든 것을 획득한 최고의 순간이다.

시인이 술을 마시면 상상의 여인은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르고 있다. 상상과 현실이 공존하지만 시인은 술을 마시는 순간만을 현실로 인식한다. 도연명은 오로지 상상의 시간을 연장하여 모든 것을 다 잊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다. 비록 시인 스스로가 술병을 기울이고 있다 하더라도 이 행위는 상상 속에서 아름다운 국화 여인을 시인의 옆으로 소환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그리고 국화꽃은 여인으로 변하여 그윽한 눈으로 술을 따르는 마술적 현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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