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외상술값 정리했다

 

김원하의 취중진담

 

연말이면 외상술값 정리했다

 

이번 달에는 술값으로 지출된 돈이 1도없다. 의사의 강력한 금주령 때문이다. 모처럼 건강검진을 받은 결과 당화혈색소 수치가 6.9가 나와서 예비 당뇨환자란 판정을 받았다. 환자면 환자지 예비 환자는 무슨 말인가.

가족력도 없는데 예비 당뇨환자 판정을 받고 보니 여간 신경 써지는 것이 아니다. 의사의 말인즉, 정상인들은 수치가 6이하여야 하고 7이 넘으면 그 때부터 당뇨환자로 취급되는데 아직은 수치 7이 넘지 않았으니 조심하라는 처방이다.

그러면 가족력도 없는데 당화혈색소 수치가 높게 나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0여 년간 변비에 좋다고 하여 설탕이 첨가된 요그루트를 끼니마다 보약처럼 먹어온 것이 결정타였고, 청탁(淸濁)가리지 않고 마셔온 술이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사과 같은 당분이 많은 과일을 즐겨먹어온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당장 끊어야 한다고 했다.

여느 환자도 그렇겠지만 먹어야 할 음식이 있고, 피해야 할 음식이 있는데 당뇨환자에게는 더 많은 것 같다. 의사가 강력한 금주령을 내렸으니 안 따를 수도 없고, 평생 마셔온 술을 먹지 말라니 속된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평생 당뇨환자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당화혈색소 수치 7을 넘지 않기 위해 피 나는 노력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6개월 시한부 금주에 들어갔다. 수치를 6이하로 떨어뜨리기 위한 비책이다.

예비 환자여서 희망은 있지만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먹고 마실 때가 그립다. 특히 젊었을 때 돈 없으면 긋고 마시던 술이 그립다. 현금 내고 마실 때 보다는 외상술이 왜 그렇게 맛이 좋았을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즘 밥집이나 주막집에서 외상으로 술․밥을 먹을 수 있는 집이 있을까. 카드가 보편적으로 통용되기 전 관공서 부근이나 회사들이 밀집한 곳에 있는 식당에는 이른바 치부책이 여러개 걸려 있는 식당이 많았다.

술․밥 먹고 싸인 만하면 OK. 그리고 월급날 외상값을 갚았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다. 매월 갚아도 외상값이 남으면 연말 정산하듯 연말에 외상값을 몽땅 갚았다. 하기야 카드로 긋고 마셔도 월말에는 카드 값을 입금시켜야 하기 때문에 피장파장이다.

외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신용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좀 규모가 큰 술집 마담들의 주 업무가 월급날 외상술값 수금이었을 정도다.

하기야 두보(杜甫) 같은 당대 대시인도 외상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두보는 곡강(曲江)이라는 시에서 조회일일전춘의(朝回日日典春衣:조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잡혀놓고) 매일강두진취귀(每日江頭盡醉歸:날마다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주채심상행처유(酒債尋常行處有:외상술값은 가는 곳마다 늘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인생살이 칠십년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네) 라고 노래했다.

나이 칠십을 고희(古稀)라고 하는 것은 이 시구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은 백수(白壽)를 하는 사람도 허다하지만 당대에 70을 살기는 어려웠던 시절이다. 죽기 전에 외상술값은 갚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시 같다.

외상술 마시며 길거리를 헤매던 것도 엊그제 같은데 모든 것이 추억으로 남는다. 월급봉투에서 피 같은 돈 떼어내 외상술값 갚는 날, 외상술값 갚았으니 한 잔 하고 가라는 주모(酒母)의 청(?)에 또 한 잔. 한 잔이 두 잔 되고 세 잔 되는 것은 예삿일. 치부책에 기록 한 줄이 생길 뿐이다.

최근에 주류 판매가 서서히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펜데믹이 음주문화를 바꿔 놨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술은 마시되 여럿이 어울리는 것보다 술 한병 사들고 집에 가서 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란다.

술 소비가 감소 됐으면 상대적으로 알코올 환자수도 감소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알코올 환자 수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홈술․혼술이 원인이 될수 있다는 것. 혼자서 술을 마시다 보면 누가 제지하는 사람이 없고, 자주 마시다 보면 알코올 환자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 알코올 환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키친 드링크(kitchen- drink)’가 문제라는 것.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하고 나서 혼자 남은 주부가 혼자서 한 잔 두 잔 하다보면 중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의들의 판단이다.

연말이 돼서 여기 저기 술 마실 자리가 많아졌는데도 그림의 떡이다. 외상술값 걱정하지 않는 것 보다는 맘 놓고 퍼 마시던 젊은 날이 그립다. 아!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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