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삽시다”

‘삶과술’을 위해 멋진 그림 한 폭이 그려졌다. 좌로부터 삶과술 김원하 발행인, 강병인 멋글씨 작가, 김영삼 화가, 윤진철 명창.

김원하의 취중진담

 

“대충 삽시다”

 

‘삶과술’을 위해 멋진 그림 한 폭이 그려졌다. 좌로부터 삶과술 김원하 발행인, 강병인 멋글씨 작가, 김영삼 화가, 윤진철 명창.

두 눈 부릅뜨고 열심히 살아도 될까 말까한 세상에 ‘대충 살자’는 말이 온당치나 한 말일까.

“대충”은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부사다. “일이 대충 정리되다.”처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이 요즘 중학생들이 생일파티 등을 하면서 콜라나 사이다 같은 음료수로 건배를 할 때 사용한다는 이른바 건배사라고 한다.

학생들이 살기가(?) 얼마나 팍팍했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 까만은 어른들은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건배사가 아닌가.

요즘 학생들 보기가 참으로 딱하다.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학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몇 학원을 순례해야 끝나는지는 몰라도 영어는 기본일 테고, 국어, 수학 등 이른바 필수학과는 가야할 듯싶다.

친구들과 뛰어 놀 시간은 애진 작에 꿈도 못 꾸는 것이 현실이다. 조금이라도 농땡이를 치는 꼴을 보였다간 “그 꼴로 살다간 너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대학 문턱도 못 간다” 부모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하기사 부모들도 가정 수입의 상당부분을 자녀들 학원비에 쏟아 부어야 하는 입장에서 공부라도 열심히 해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케이크 놓고 음료수를 마시면 됐지 무슨 놈의 건배사까지 해야 하는가. 아이들은 부모님 하는 대로 배우는 법. 부모님들이 가족 모임 같은 것을 하면서 술을 들기 전 ‘위하여’ 같은 건배를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우리도 해보자는 의기투합해서 짜낸 건배사가 “대충 삽시다”이었을 것 같다.

‘공부 열심히 해라’ 같은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대충’이란 단어가 더 올랐을 성 싶다.

지난 5월 1일은 1923년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 ‘어린이 해방 선언’을 발표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방정환 선생의 선언은 1924년 국제연맹 총회의 ‘제네바 아동 권리 선언’보다 1년 앞선 것으로, 오랜 압박에서 어린이를 자유롭게 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배우고 놀 권리 등을 명시했다.

당시의 압박은 일제 강점기였던 시절이라 요즘 청소년들이 받는 압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압박이다.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건배는 로마시대부터 하던 풍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적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방 술잔에 독극물을 넣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술잔을 부딪치면서 술이 섞이게 하던 것에서 건배가 유래되었고 한다.

이제 술이 있는 모임에서 첫잔을 들기 전 건배는 필수다. 좀 규모가 있거나 의미가 있는 모임에서는 건배사도 필수가 되었다. 건배제의를 받은 인사가 건배사를 해야 술을 마시는 것이 예의처럼 되어 가고 있다.

대부분의 건배사는 한 문장의 앞글자만 모아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고기 집에서 하는 건배사로 ‘한․우․갈․비’라고 했다면 이는 :한 마음으로 :우리는 :갈수록 :비상하리라는 뜻이란다.

돼지 갈비 집에서 술을 사는 입장에서는 “뭐야 한우갈비 사라는 거야”하며 씁쓰름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나.

몇 년 전 어느 경제신문이 ‘대충 삽시다’라는 부제로 연재를 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열정’ ‘패기’와 같은 말로 대변되는 청춘들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열심히 사는 것보다 대충 사는 게 더 낫다고 입을 모았다고 했다.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대충’은 회피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방향의 제시와 같다고 했다.

현재 2030세대에 만연한 ‘대충 살자’의 가치관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좌절과 체념으로 만들어졌다. 어떻게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고 열정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일종의 포기를 한 것이다. 그래서 ‘대충 살자’는 말은 ‘어차피 이룰 수 있는 게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허무주의로 비춰질 수 있다.

어린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는 부모님들의 강권, 젊은 세대들은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사회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열심히 해도 달라질 것 없는 사회에 깊은 상심과 무기력함을 겪는 세대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차라리 그 열정을 포기하는 ‘체념’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충 살자’는 가치관이 만연하게 된 진짜 배경은 아닐까.

지금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여보게 친구! 더 늙기 전에 술 한 잔 하면서 인생을 논해보세. 대충 살아도 한 세상 사는 것. 매 한가지 인 듯 싶네그려.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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