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며 삭제하며 살며
임 재철 칼럼니스트
스치는 가을바람이 싸늘하다. 이 가을에 이순(耳順)이 지난 필자는 추억의 뒤안길에서 서성이는 느낌이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홀로 걷다가 돌아다보면 살아온 뒤안길에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 살아온 날들이 쌓여지면 그리움에 매달리게 되는 걸까.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정감이 있고 감미롭다. 누렇게 변한 책 등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가슴에서 배어나는 은은함에 저절로 눈이 감겨진다. 무엇보다 가슴 깊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고향과 돌아가신 모친의 애틋한 정감을 되살려주는 그리움은 언제나 크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마냥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가 없기에 이 가을에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지우고 삭제하며 살아가는 지혜’ 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채우려고만 한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비우는 지혜를 알아야 하겠다는 거다. 누군가 버릴 줄 아는 것이 경쟁력이라 했듯 비운만큼 몸은 홀가분해지고 마음은 가벼워지기에 말이다.
자본주의와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많은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인터넷 시대에 모든 것이 발 빠르고 편해졌다. 그러나 인간의 편리만을 가져온 건 아니다. 핸드폰과 PC는 인간의 삶을 옥죄고 시간을 잡아먹는 도구가 됐다. 즉, 그만큼
의 행복이 사라지고 있다. 예전의 행복했던 아날로그 감성의 모습들이 오히려 부러울 정도다. 문제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미하엘 코르트는 <비움>에서 그 이유가 인간들이 채우기만을 바라며 살기 때문이라고 꼬집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사람들이 더 없는 자본과 물질에만 허덕인 채 비우는 삶을 살지 못하는 까닭이라 진단한다.
그래서 지인 중 어떤 이는 은퇴 후,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차도 소형차로 바꾸었더니 되레 조금 비우는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필요이상 많을 것을 무겁게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우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려있는데…, 그러나 어쩌면 너무 느긋하게 한가하고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을 비우려면 경제적으로도 팍팍하지 않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처럼 ‘단 하루만 즐겁게 살자’는 마음을 갖는다면 평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죽어 편안한 천당에 가기보다 똥밭에서 고통스럽게 뒹굴어도 이승에서 사는 게 더 좋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이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인 바, 문득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고 한 에리히 프롬의 말이 상기된다.
필자의 주위를 보면 ‘지우고 삭제하며 사는 지혜’의 하나로, 예컨대 3년 동안 연락이 없거나 소식이 없는 사람은 연락처를 과감히 지워 버린다는 지인이 몇 사람 있다. 필자 역시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도 각양각색의 사람이 존재하지만 함의(含意)가 있다는 전제 아래, 상당 기간 연락이 없는 이들을 장부에서 삭제해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간혹 불편함이 동반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수많은 기록 중의 하나인 저장된 연락처를 지우고 삭제하는 것이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사람은 누구나 저장 본능 같은 것이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그 기록이 쌓이는 것으로 짐을 만들기보다는 적절히 기억과 기록을 지우고 삭제할 줄 아는 용단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상에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 시각에서 특히 우리가 ‘지우고 삭제하는 것’도 자기의 기준에서 결정을 하게 되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아니라 편견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한 때 필자 역시 어두운 시련에 빠져 죽음까지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내 탓이라 생각하고 하나씩 지워가며 주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기도하며 이겨 냈었다.
살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고, 때로는 전혀 계획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게 인생이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자기 확신(自信)을 버려야 하겠다. 그래서 선배들이 은퇴하면 비우고 버리고 놓아주라 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육십이 넘어 가면서 필자는 삶에 대한 경험뿐만 아니라 결국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으로 빈손처럼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는 조락의 들녘처럼 모든 욕망을 끊고 가야 한다’는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의 설법이 생각난다.
누구나 ‘앞으로 살아 갈 길’은 곧 ‘살아온 길’이 될 것이다. 필자 또한 살아온 길보다 살아갈 길은 분명 짧다. 그래서 덜 후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중국말에 ‘인생 그저 그렇다(人生不过是如此)’라는 표현이 있다. 그저 오롯이 삶인 것이기에, 버리고 비우며, 지우고 삭제하며 인생을 대하는 지혜로운 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