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신임은 얻고 건강은 잃는 술상무
사람 사는 게 참으로 공평하지 못한 것도 많다.
어떤 사람은 술을 지나치게 먹어서 부인이 “저 웬수 덩어리”라며 허구한 날 바가지를 긁게 만드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술을 한 잔도 못해서 사업상 손해를 보는 것이 아타깝다며 어떻게 하든지 술을 배워보라고 독촉을 받는 사람도 있다.
두 부류를 하나로 묶어서 절반으로 가른다면 더 없이 좋겠다마는 그 또한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타고난 팔자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술 상무’란 호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전적 의미는 ‘남을 대신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을 농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술 과장’이나 ‘술 부장’ 또는 ‘술 이사’란 직책(?)은 건너 띠고 하필이면 상무직책에 술을 붙였을까.
높은 사람이 접대를 하기 위해 상대방을 초청했는데 막상 장본인은 술을 잘 못해서 대신 대작할 사람을 동행시킬 때 직책에 관계없이 상무로 승진시켜 동석케 한다. 비롯, 대리나 과장이라도 이 날 만은 어엿한 상무소리를 듣는다.
술 상무로 선발되는 경우는 대게 신입사원 시절이거나 타 부서로 전보될 때 입을 잘못 놀려 톡톡히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 직장인들의 후일담이다.
신입사원 때 출근 첫 날 환영식에서 “자네, 술은 잘하나?”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부분은 호기롭게 “예, 잘하는 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술은 어느 정도 마셔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주량 이상 마시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부서 또는 회사의 공식 술 상무로 급승진하게 만들기도 한다.
‘술 상무’로 발탁되면 회사 생활 내내 술자리만 불려 다닐 수도 있고, 회식 자리서 술은 도맡아 마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물론 높은 사람과 술 대작을 해야 하는 관계로 동료들에 비해 승진은 빠르게 될 수도 있지만 건강을 잃게 되는 것이 술상무의 비애다.
술자리가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이 술 상무한테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그럼 술 상무란 직책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일까.
며칠 전 모 신문사에 김하중 前 통일부 장관의 인터뷰 기사가 났는데 김 전 장관은 “진짜 중국의 리더들은 술을 잘 안하다. 그 나라에도 우리식의 ‘술 상무’가 있다. 식사 자리에 10명 나오면 그 중 3-4명은 젊은 사람, 술 대표가 있다. 높은 사람은 고량주 한두 잔만 마시고, 술 대표들이 상대한다.”고 한 것을 보면 높은 사람을 위해 대신 술을 마셔주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 사회에는 진짜 술을 팔기 위한 술 상무가 있다. 다름 아닌 술 메이커에서 영업담당 임원이나 점장들이다. 이들은 낮부터 밤늦게까지 영업을 위해 술을 마신다. 일반직장에서는 생각도 못할 만큼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 그래도 술 취한 내색을 하지 않는다.
주당 사회에서는 자신의 주량을 대부분 뻥튀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752명을 대상으로 ‘평균 주량’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직장인의 52%는 회식 시 자신의 주량을 거짓말해봤다고 밝혔다는 것이다.주량을 부풀려 거짓말 했다는 직장인이 72.1%, 줄였다는 직장인이 27.9%로 ‘잘 마신다’고 말한 직장인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주량을 부풀려 거짓말 한 이유는 ‘상사에 잘 보이기 위해’가 50.7%였고 ‘동료와의 경쟁심리 때문’이라는 대답도 29.4% 이었다.
이런 통계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잠재적 ‘술상무’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승진이나 거래를 위해서는 건강쯤은 뒷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할 뿐이다.
하기야 1997년 4월 9일 부산고법은 ‘술 상무’ 질병死도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바 있어 술 상무도 어엿한 직책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