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은 술잔에서 나온다

김원하의 취중진담

 

술맛은 술잔에서 나온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막걸리로 가장 많은 덕(?)을 본 대통령을 꼽으라면 박정희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1962년 6월 경기 김포에서 모심기를 하고 논두렁에서 농부와 막걸리를 마시는 한 장의 사진이 이듬해 치른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득표율 1.5%로 이길 수 있게 한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서민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포 막걸리 사진 말고도 박 대통령이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은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막걸리를 즐겼고, 이명박 대통령은 “나는 막걸리 국제홍보 팀장”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막걸리를 사랑했다. 관련된 사진으로만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막걸리 잔은 양은 막걸리 잔이고, 노무현 대통령의 잔은 종이컵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잔은 유리로 된 와인 잔이다. 아마 행사장에서 건배를 하기 위해 그랬던 모양이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술을 마신다. 조선시대 금주령이 발동되어 술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관혼상례(冠婚喪禮)에서 술 대신 정화수를 떠 놓고 지냈는데 이 때 정화수를 현주(玄酒)라고 불렀다. 이는 우물 안 물이 달빛이 비춰지면 검게 보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혼인 날 합환주(合歡酒)를 마시는 것도 술이 인간사회에서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부부의 처음에 합근하여 술을 드릴 때 표주박을 쪼개서 잔을 만들고 다시 합하여 그로써 술을 수작(酬酌) 하여 성례한다.”는 합환주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인생의 첫 출발점에서도 술은 필수품이 되고 있다.

이렇듯 술은 우리 일상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귀한 물질인데도 막상 술을 마실 때는 술잔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술은 상품이다. 따라서 술병도 중요하고 이를 포장하는 박스도 중요하지만 술의 마지막 포장은 술잔이 아닌가. 따라서 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술잔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회사들이 선전용으로 제작한 소주잔이 진정 소주잔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 양은(洋銀)이 처음 나왔을 때는 가볍고 신제품이란 의미에서 모든 식기를 양으로 했다. 양은 냄비를 비록해서 양은 주전자, 양은 술잔이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때문에 막걸리는 양은 술잔으로 마셔야 제격이라는 생각이 주당들 사회에 박혀있다. 아무 데나 따라 마시면 됐지 술잔을 따지느냐고 할 수 있지만 술 한 잔 마시더라도 격을 갖추고 마시면 훨씬 술맛이 좋아진다는 것은 진리다.

이를테면 와인을 종이컵에 따라 마셔 보면 알 수 있다. 반대로 막걸리를 와인 잔으로 마셔보라. 느낌뿐만 아니라 훨씬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와인 잔이 없으면 맥주잔이라도 찾아서 마셔보면 막걸리가 훨씬 고급스러워진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일은 와인은 와인 잔으로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전통주나 막걸리는 격에 맞는 술잔이 있는 것인가.

와인 잔을 보더라도 모양 세와 종류가 다양하다. 입이 닿는 부분 립이 얇고 견고한가. 건배를 하는 보울은 와인 마다 다르다. 또 보울에 절대 지문을 남기지 않는 것이 와인 에티켓이다. 열전도를 방지를 위한 스팀, 받침이 되는 베이스까지 세심한 배려로 와인 잔이 만들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의 술잔에서 이런 세세한 부분을 생각하여 제작된 술잔이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는 계영배(戒盈杯)로 술을 마셨던 후예(後裔)들이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1779~1855)이 늘 곁에 둔 물건이 계영배라는 이름의 술잔이다. 계영배는 과학이며 철학이 담긴 술잔이다.

세계 주류 시장에 계영배 같은 술잔이 한국의 진정한 술잔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전통주업계는 현재 우리의 막걸리를 세계인들이 막걸리를 마음껏 즐길 수 있고, 수출활로를 찾기 위해 ‘막걸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지만 막걸리 잔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는 정해졌는지 모르겠다. 와인 잔을 보면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는 한국 사람들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막걸리의 고급화도 좋고, 문화유산 등재도 좋다. 그에 앞서 잔만 보면 막걸리를 떠올릴 만한 술잔 개발도 중요하다. 진정한 주당들은 “술맛은 술잔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소주잔이야 주류메이커들이 그렇게 정착시켜서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우리의 술은 우리의 술잔으로 마시고 싶다. 술의 진정한 가치를 위해서.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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