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음식이었던 이집트의 독특한 음주문화(上)

 


술이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

술이 음식이었던 이집트의 독특한 음주문화(上)

 

조성기(아우르연구소 대표/경제학박사, 보건학석)

 

아프리카와 이집트

이집트의 술에 대해 살펴보자면 아프리카의 음주상태를 먼저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 주류업체들이 아프리카 시장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더운 대륙에서 술 소비가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타임지의 취재결과를 보면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black continent)’이 아니라 ‘만취 대륙(drunk continent)’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는 평가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의 맹주 중 하나다. 우간다, 남아연방 등과 함께 아프리카의 정치를 통제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런데 음주량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종교적 이유다. 이집트는 이슬람교가 주된 종교이기 때문에 술 소비는 매우 적고, 그 양도 줄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취한 대륙이라고 보는 게 좋다. 물론 모든 국가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술을 안 마시는 사람(57.3%)이 더 많다. 그렇지만 음주자의 25.1%는 폭음자다.

그러니 아프리카 사람들이 음주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틀린 것이 아니다. 특히 다국적 대형주류업체들은 아프리카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에 한국 맥주나 소주 업계가 시장 확보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최근에는 복분자, 인삼주 등 일부 특정주류만 소량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술에 대한 품평은 좋다. 그러나 수출에 대한 적극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프리카의 음주량은 글로벌 평균인 6.13리터 수준이라고 보면 맞다. 유럽의 평균 12.18리터와 미주 평균 8.67리터보다는 적지만 동남아시아가 2.2리터, 무슬림 국가들이 0.65리터이기 때문에 평균이 뒤쳐지지 음주국은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마신다. 실제로 남아연방의 경우 세계 최고의 음주국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통계가 부정확하여 세계보건기구 통계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케냐의 음주는 그야말로 유명하다. 통계로는 4.1리터지만 역시 그 이상 마시고 있다는 소문이다. 주세를 내지 않고 제조하는 술이 많고 그 통계는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남아연방은 1인당 연간 9.5리터를 마신다. 콩고 4.2리터, 앙골라 5.4리터, 탄자니아 6.8리터, 우간다 11.9리터, 나이지리아 12.3리터다. 역시 비기록통계의 부정확성을 감안해서 보면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아프리카 시장이 그리 소홀히 해야 할 시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주류업계가 과연 이 시장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평생금주자가 유럽(18.9%)과 미국(17.7%)보다는 많으니 전부 다 주정뱅이는 아닌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 선입견 보다는 아주 큰 시장이 아프리카에 있다. 특히 우간다나 나이지리아, 남아연방 등은 유럽 국가들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다.

 

술이 음식이었던 이집트

‘이집트!’ 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의 나라이자 회교국으로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술을 안 마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상식은 맞지 않다. 이집트 사람들은 많이는 아니지만 술을 마신다. 최근 여행자들 경험으로는 지방맥주 3가지를 쉽게 접할 수 있고, 수입맥주가 다양하다고 한다. 와인도 파는데, 특별한 사람들만 마시는 비인기 주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집트의 음주문화는 상당히 독특하다고 평가된다. 특히 음주패턴과 알코올 소비량이 4,000년 역사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니 말이다. 우리는 음주문화가 근세에 들어 급격히 변화했다. 과음과 폭음을 일삼는 음주는 일제강점기가 지나 고속경제성장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집트는 수천 년간 불변이었다.

문화와 종교가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가설은 대체로 수용된다. 그렇다면 이집트인의 종교와 문화가 그들의 전 역사를 통해서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음주문화를 알려면 종교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또 특이한 점은 고대 음주제조국이면서 음주량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긴 이집트 역사 속에서 항상 술이 있었지만 그 음용량은 적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집트인은 주로 곡물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모든 이집트인들에게 음식이자 음료였다. 이집트인들에게 술은 ‘중독물질’이 아니라 음식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와인류의 술은 축제 때나 가끔 마셨다. 증류주는 잘 마시지 않았다. 지금은 변했지만 과거에는 독한 술은 사악한 물질이거나 기피물질로 간주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약한 술을 주로 소비했다. 역사가 오랜 나라인 이집트에서 술이 음식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술은 ‘영원한 생명’이자 문화

이집트 역사는 다른 나라 역사와 달리 역사적 사실들이 신뢰할만하게 서류로 잘 정리되어 있다. 7,000년의 역사가 거의 모두 입증 가능하도록 정리되어 있다. 조각, 벽화, 파피루스 유품 등을 살펴보면 초기 이집트인들의 삶을 아주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 속 술의 의미를 밝히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3200년 이집트왕조 설립이전 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가 영속적’이라고 믿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사후세계는 사전세계와 같았다. 죽은 자들에게 산 자와 마찬가지로 음식과 술 등의 공물을 제공하였다. 사제가 신전에서 제례를 실행할 때 하루에 3번, 음식과 술과 의복 등을 바치었다.

이러한 방식의 매장 행위는 1대 왕조에서 4대 왕조를 거치는 기간 중에 점점 더 일반화되었다. 매장할 때 사용하기 위해 음식과 술을 비축한 특수 창고가 있었고, 장례식을 관장하는 신전도 건축되었다. 술이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기원전 3,150년에서 2,350년, 고대왕조에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 된 신권정치가 행하여졌다. 왕은 태양의 아들로, 신과 인간의 중재자였다. 국민은 왕의 엄격한 통치 하에 있었다. 태양신에 대한 제례가 최고 권위를 가졌고, 신전이 건축되었다.

종교는 왕과 국가를 위해서 조직되었다. 법전도 왕을 위해 제정되었고 모든 문학작품도 왕에게 바쳐졌다. 왕 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피라미드를 둘러싼 거대한 묘역에 노동과 공물을 바치는 자들은 마치 왕이 가지는 영속성을 자신들도 공유하는 듯 여겼다. 왕과 자신들이 공유할 수 있는 매체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술이었다. 술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영속성을 주는 공물 중 하나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음주 패턴은 이러한 문화요소와 종교의식과도 일치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빵과 맥주를 생존의 기본요소로 여겼지만 와인이나 증류주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맥주와 빵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맥주는 술이라기보다 하나의 음식이었다. 빵과 맥주는 먹는 것으로나 바치는 것으로서 사회문화행위의 초점이었다. 빵과 맥주는 매일 두 번씩 죽은 왕을 위한 신전에 바쳐졌고, 300명이 넘는 신전의 종사자들이 먹었다.


이집트노동자들의 점심은 빵, 맥주, 양파 등이었다. 어린이도 엄마도 모두 건강과 영양을 이유로 맥주를 마셨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 주인이 하는 인사말도 “빵과 맥주(Bread and Beer)”였다. 이 말은 요즈음 ‘헬로우(Hello)’다. 이집트인들은 대부분 맥주를 사교로 적당량 마셨다. 가끔 과음도 했다. 과음은 사람이 죽은 후 40일이나 70일 후 장례를 마지막 날 했다. 한 달 치 음주량을 하루에 다 마시는 경향이 있었다.

이집트에서도 맥주 집을 자주 가거나 맥주나 와인 등을 과음하는 것은 못마땅해 했다. 문제 있는 행동으로 낙인이 찍기도 했다. 맥주는 가정에서 양조되었고 공물로 바치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제조되었다. 밀과 보리가 많이 경작되었고 풍작인 경우가 많았다. 빵은 양조과정의 부산물이었다. 이집트 맥주는 진하고, 영양분도 많고 신선했다.

맥주용기가 진흙으로 제조되어 단기적 보존이 전부였다. 지금 누비아(Nubia)지방이나 수단(Sudan)지방에 있는 보자(bouza) 맥주는 그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다. 와인과 리큐르 등은 무화과나 대추야자나 포도로 만들었다. 이집트의 와인은 증발을 막고, 여과과정의 손실을 줄이려고 덜 숙성된 상태에서 마셨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종교의식과 문화의식이 자신들을 위한 의무적인 행위, 자기만족, 친숙한 행동패턴 들이었다. 왕조시대 이집트인들은 자신감이 넘쳤고, 일도 열심히 하였으며, 낙관적이었다. 사후세계를 위해 필요한 음식물과 함께 묻혔고, 부활할 것을 기대하였다. 맥주사용법 이면에는 이러한 도덕률과 종교가 작용하고 있었다.

 

기원전 이집트에서 시작된 예방교육

B.C. 2350년부터 B.C. 1600년의 시대는 이집트의 혼란기다. 9왕조시대나 10왕조시대인데 모두 단명으로 끝났고 왕이 자주 바뀌었다. 그 시대에는 삶과 사회에 대한 의혹이 컸다. 11왕조와 12왕조는 중왕조다. 이때 다시 안정을 찾는다. 태양신 레(Le)신에 대한 숭배가 땅과 곡물의 신인 오시리스(Osiris)신에게로 옮겨졌다. 전에는 왕이 사후 세계를 보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제는 오시리스 신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되었다. 모든 이집트인들은 죽게 되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믿었다. 중왕조에 와서 영생의 비결이란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왕조는 B.C. 1600년경부터 330년 정도까지다. 중왕조는 힉소스(Hyksos)의 침입으로 종말을 맞았다. 힉소스의 지배를 100년 정도 받은 후 이를 물리친 신왕조는 이집트의 18왕조다. 테베정권인 신왕조는 공기의 신인 아문과 태양신인 레를 결합하여 신중의 신, 아문-레(Amun-Re)를 창조하였다.

두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두 의식이 있었다.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은 정기적인 축제였다. 이 때 순례자들이 몰려들었고, 맥주와 와인이 다량 소비되었다. 이때 거르기, 끓이기, 석기저장항아리 등 와인저장기술이 발달하였다.

신왕조시대에는 풍요와 번영이 지속되었다. 축제는 통상 1달이나 계속되었다. 전체 왕국의 신인 아텐(Aten)의 제례를 보면 상당량의 술이 소비되었다. 그 때 요즈음 같은 음주문제예방활동 교육을 시도한 두 사람의 현자가 있었다. 아니(Ani)와 아메네호텝(Amenehotep)이라는 현자들은 학생들이 집이나 여관에서 술을 과음하는 것을 막았다. 알코올의존 증상을 가르쳤으며 술과 관련된 타락과 죽음을 강론하였다.

 

기독교의 도입과 적당한 음주

B.C. 330년부터 A.D. 15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에는 이집트방식 제사와 그리스방식 제사가 있었다. 그렇지만 왕조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질적인 인구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통치체제가 구축되었다.

이집트에 망명한 유태인들은 엄격한 관례에서 벗어나 그리스 화 되었다. 정복자인 로마인들이 이집트인의 종교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는 없다. 즉, 이집트의 종교는 손상되지는 않았다. 그 시대에 새로운 종교가 태동했다. 오시리스신과 호루스신 등이 부활하여 이집트인들의 정서를 재생시켰다.

또한 구시대의 제사방식에서 벗어나 신과 개인과의 관계가 더 밀접해졌다. 로마시대의 이집트종교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기독교도 들어왔다. 로마인들은 이집트의 생활양식과 언어를 인정했다. 그리스로마시대의 음주문화 또한 3,000년 전과 유사하게 유지되었다.

기원후 1세기동안 이집트내의 기독교사회는 그다지 커지지 않았다. 2세기말경에 북부 이집트의 유태인부락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그 시대는 기독교포교에 우호적 분위기였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도 기독교가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졌고, 구원을 주고, 희생적이고, 불멸의 희망을 주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수용적이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 신에게 다가가는 교량의 역할로 접했다.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은 무덤속의 음식과 술, 사후의 시신보존 등의 이교도의 관점을 활용하였다. 기독교의 금욕적인 요소도 받아들였다. 350년경 이집트는 광범위한 기독교 국가로 변화되었다. 기독교의 전파력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기독교는 이집트의 기존종교와도 유사점이 많았다.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이집트사회 진입에 장애가 없었다.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은 지금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를 자체적으로 임명하고 자체 제작한 성경을 읽는다.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이 알코올과 음주에 대한 입장은 다면적이다. 와인(Wine)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의미도 다양하고, 상징이기도 했다. 구약에서는 와인을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만취하는 행동에는 비난했지만 술은 모든 축제에서 선물로 사용되었다.

예수(Jesus)가 물로 술로 만든 성경내용은 기적을 말하려 한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술소비의 권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가 술을 만취토록 마시라고 권장한 적은 결코 없다. 하지만 술을 자신의 피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사도 바울(Paul)도 수종환자들에게 술을 약으로 처방했다.

사도 바울은 술이 신체와 사회에 주는 폐해를 설명하면서 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이집트기독교회는 적당한 음주는 허용하며, 과다한 음주와 독주음주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규율 역시 잘 지켜져서 오늘날 이집트 음주문화가 건강하게 발전했다고 본다.

 

아랍지배기의 주조기술발전

이집트에 아랍인들이 침입한 것은 641년이었다. 이집트종교가 이슬람교로 전환되는 속도는 사실 느렸다. 아랍 화와 이슬람 화에는 수세기나 걸렸다. 아랍의 침입자 쉬트 패티미드(Shiite Fatimids)는 국민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패티미드 왕조시대(969 –1171)에는 기독교가 성행했다.

그래서 ‘적당한 음주’를 포함한 이집트의 문화와 관습이 수세기 동안 남아 있게 되었다. 알하킴왕이 금주를 위해 맥주와 와인을 나일 강에 쏟아 부은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왕의 금주정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고 시신조차 찾지를 못했다.

그 이후 왕과 상관없이 이집트의 적정 음주습관은 계속되었다. 맘룩(Mamluk) 왕조(1382-1517)의 경우는 이슬람 왕조였다. 그런데도 음주에 대해 허용적 이었다. 오토만(Ottoman)왕조(1516-1805)의 경우도 상이한 언어와 인종으로 구성된 지방에 따라 자율적으로 음주량을 결정했다. 중앙정부가 통제하지 않았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에 차이가 있었단 것이다.

15세기 초반 이집트인의 음주생활 정보가 있다. 날씨가 따뜻하고 습하였기 때문에 와인을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생각해 낸 것이 와인에 당밀이나 꿀을 넣는 보관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그때 맥주소비량이 줄었다. 기술발전이 재구매의 증대를 가져온 사례다.

대다수 기독교도들은 기독교가 음주를 금한다고 생각한다. 수도생활을 하거나 금식기간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은 생활이 풍족했지만 과음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슬람통치 시절에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회에서 와인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약탈자들은 훔친 와인을 마시고 길거리에 만취상태로 발생되곤 했다. 술과 인간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현대 이집트와 술소비

19세기 이후의 이집트를 현대이집트로 구분한다. 조선시대의 순조 이후가 그 시기에 해당된다. 고대이집트로부터 현대이집트에 이르는 음주문화와 지배자들을 같이 살펴본바 종교가 달랐지만 음주문화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금주를 하는 지배자가 국민들의 음주는 근원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래도 이집트인들의 종교는 술소비에 매우 중요했다.

왕 모하메드 알리는 농업을 활성화하여 수출을 늘렸다. 산업화를 촉진시켰으며 군사력의 팽창시켰다. 농산물을 상품화하고 토지소유권 개혁을 시도해서 곡물, 과일, 면화, 설탕 등 농산물작황이 크게 팽창시켰다. 팔라(fallah)라고 불리는 농부들은 연중 250일 동안 일을 했다. 군대와 제조업은 싫어했다.

군대는 외국인들이 차지하였고, 외국인들에게 통치되었다. 행정부에 이집트인들 자리가 있었지만 1세기 동안 큰 변화는 없었다. 불행히도 왕의 정치기술을 전수받은 후계자가 없었다. 수에즈운하의 권한도 외국인에게 넘어갔다.1881년부터 1954년 까지는 영국인들이 통치를 하였다.

영국 크로머총독은 농업을 1모작으로 바꾸었다. 영국 랭카셔지방의 생산물을 수입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식량생산을 줄였다. 이때 지방에 산적들이 발생하였다. 1차 대전 동안에 이집트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모든 사회문제는 방치되었다. 1923년에 독립이 되었지만 외국인 침입자와도 같은 왕족들이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20세기 초에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부활되었다.

현대이집트의 문제는 질병, 빈곤, 인구과잉 등이다. 1936년 이후 이집트인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태교도들이 증가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결국 194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포함한 전체 아랍 국가들과 전쟁이 발생하였다. 전쟁동안 재난이 계속되었고 국내도 파산상태가 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정치를 폐지하고 2,000년 만에 다시 이집트인 정부가 탄생되었다.

1967년부터 이집트의 경제적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러자 종교집단들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종교집단들이 정부에서 실권을 차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외관상의 약진했다. 인구과잉과 농업의 작황문제로 도시화가 급격히 진전되었고 서구문화가 유입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변화로 술소비량이 늘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이집트의 대표생산업체는 ‘Al-Ahram Beverages Co.(ABC)’와 ‘Egyptian International Beverage Co.(EgyBev)’ 등이 있고, ABC는 네덜란드계 세계적인 브랜드인 Heineken의 라이선스를 받았다. 수입은 주로 유럽 및 미국에서 한다. 2010-11 회계연도기준 맥주총수입(약 86만 달러)의 60%(약 54만 달러)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했고, 포도주는 미국 및 유럽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미국와인이 전체수입(약 미화 6만 달러)의 27%가량(1만6000달러)정도다.

수입주류는 수입관세(1200~3000%)를 감안할 때 대부분이 면세점에서 판매되는 상황이다. 관광지역 호텔이 특별 주류 판매 라이선스(Special Service Licence)를 통해 관광객 등에게 판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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