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47)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 <Bacchus and Ariadne> 작품은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첫 만남을 묘사한 것이다. 화면 중앙 젊은 신 바쿠스는 사랑에 빠져 아리아드네를 잡기 위해 한 쌍의 표범이 끄는 황금 마차에서 뛰어 내리고 있고, 바쿠스의 여자 추종자는 심볼스를 치려고 하고 있으며 추종자 옆에 있는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는 뱀에 휘감겨 있다. 포도 넝쿨로 만든 머리 장식과 포도 빛 망토가 바쿠스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림 속 왼편에 위치한 공주 아리아드네는 수평선 위의 배를 바라보면서 멀리 떠나간 연인 테세우스를 향해 애타는 마음으로 손을 뻗고 있다. 그녀는 바쿠스의 등장에 몹시 놀란 듯하다. 아리아드네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바쿠스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열정적인 몸짓으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바쿠스를 중심으로 실레노스와 사티로스 등 ‘주신제’의 행렬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화려하게 축복하는 느낌이다.
그녀 머리 위에 있는 하늘에 떠 있는 7개의 별은 바쿠스의 결혼 선물을 상징한다. 바쿠스가 결혼하면서 7개의 별이 박힌 왕관을 아리아드네에게 만들어 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페라라(Ferrara)의 공작 알폰소 데스떼(Alfonso I d’Este, 1476-1534)가 개인 집무실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한 그리스 ‧ 로마 신화의 에피소드를 다룬 시리즈 중에 마지막 작품이다.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는 결국 바쿠스를 만나 위안을 받고 그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 바쿠스에게 결혼 선물로 왕관을 받았던 아리아드네가 후에 죽자 바쿠스는 그녀가 쓰던 왕관을 하늘의 별자리로 올려주었다. 그림 속에서도 아리아드네에 대한 바쿠스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징표인 왕관자리가 왼편 하늘에 그려져 있다.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가 만나는 운명적인 순간을 아름다운 색채와 탁월한 묘사로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다양한 주제를 유화뿐만 벽화, 패널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표현했다. 고대 신화, 역사화, 초상화 등에서 그는 르네상스 미술의 사회적 문학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딸로 아네테의 왕자 테세우스에게 반해 미궁을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려주고 왕자와 같이 크레타를 빠져나왔으나 바쿠스의 섬에 버려진다. 이 그림은 바쿠스가 그런 아리아드네를 보고 첫눈에 반한 순간을 그리 작품입니다. 왼편 위쪽의 별들은 바쿠스가 아리아드네의 왕관을 하늘로 높이 던져 왕관자리가 된 별들이다. 그리고 중앙 하단에 유난히 눈에 띄는 꽃은 케이퍼(Capers)라는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특히 바쿠스를 보면) 아주 역동적인 것 같다.
이처럼 미노타우르스를 죽임으로써 확고한 영웅이 되고, 아리아드네와 함께 고향을 향해 도망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리아드네와 헤어지는데, 대단히 많은 판본에서 서로 다른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대략적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아리아드네를 데려가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예언 때문에 아리아드네를 버리게 되며, 아리아드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결혼한다.
2)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리아드네가 싫증이 나서 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임신한 채로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를 근처 여인들이 불쌍하게 여겨서 테세우스가 쓴 가짜 편지를 보내주며 위로했고, 그녀가 죽자 무덤을 만들어주고 매년 그녀를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3) 애초부터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수작을 부려서 그녀를 섬에 내려놓고 출항 시키게 한다.
4) 임신한 아리아드네가 멀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에서 내려 쉬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풍랑에 떠내려갔다.
1)번이나 3)번 판본이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내용이긴 하지만, 구전 신화에서 전통성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니 원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된다. 어찌되었든 이 일로 인해 테세우스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가게 되면 배에 흰 돛을, 그렇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기로 한 약속을 까먹고 검은 돛을 단 채로 고국으로 돌아오고, 검은 돛을 본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전사한 것이라 생각하여 배가 들어오기도 전에 비탄 속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사이의 바다가 ‘에게 해’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깃발 색 때문에 오해하여 벌어지는 비극 모티브는 세계 여러 설화에서 등장하는 클리셰(cliché), 즉 상투어이기도 하다.
Dionysos의 신격화
디오니소스는 토착 신이면서 이방의 신이고, 남성이면서 여성이고, 신인 동시에 인간이며 동물이다. 이렇게 그는 양극단으로 나뉘어 다투는 상황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힘과 지혜를 상징한다.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사유의 또 다른 특성은 각각의 신격들이 특정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기능에 따라 결정되는 신화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최고의 그리스 학자 장 피에르 베르낭(Jean-Pierre Vernant, 1914-2007)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리스의 신화 체계는 개별적 신들이 지닌 고정된 기능들 내지 특성들이 단순히 합해진 전체로서의 체계가 아니라, 여러 신들의 기능들이 상황에 따라 서로 배척 또는 조화를 하며,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로서의 체계다.
예를 들어, 아테네 여신이 직조술 내지 기술의 수호신으로 규정될 때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us)와 한 짝을 이루지만, 아테네 도시 국가의 수호신으로 규정될 때는 전쟁의 신 아레스(Ares)와 한 짝을 이루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통 때는 이성을 상징하는 아폴론 신과 대립되는 디오니소스 신도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행해지는 신탁을 묻는 의식에서는 디오니소스 신과 한 짝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제우스가 초월적 존재로서 오직 유기적 차원에서만 모든 것을 관장하는 기독교적 절대 신과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제우스는 만신들의 정점에 서 있기는 하지만, 종적 차원 내지 개별자 차원에서의 존재자들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가 맡고 있는 기능들은 때로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연의 특정 영역들을 관장하는 다른 많은 기능들은 하등 신들에게 일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 만신전의 체계는 제우스 혼자가 아닌 모든 신들이 함께 일하는 하나의 공동 작업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의 신들은 하나의 절대 불변적 신격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하는 다중적 신격-예를 들어, 제우스가 행복한 제우스(Zeus Olbios), 지하의 제우스(Zeus Katachtonios)등으로 불리듯이-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체계의 작용 원리가 이렇게 기능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신격도 일단 그리스의 신화 체계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오면, 질적인 변환을 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신화 및 종교 일반에 대해 품고 있던 개념 체계의 특성이 그러하다면,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디오니소스 신의 성격은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화 및 의식은 본래 다른 나라- 트라키아, 크레타, 이집트 등- 에서 유입된 외래의 것이고, 남성 위주의 그리스 사회에서 특이하게 여성들만이 참가하는 광기로 가득 찬 의식이며, 따라서 국가가 관장하지 않는 일종의 사적인 비밀 의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보통의 의식과는 특이하게 다른 이 의식은 어떠한 이유에서 아테네 도시 국가에서는 융성하게 되었는가?
사실 디오니소스 의식은 그리스에로 유입되면서 경건함 속에서만 진행되는 다른 공식적 종교 행사와는 전혀 다른 특이성- 신들린 상태에서 고함을 지르며 춤추기, 염소가죽으로 만든 공 위에서 젊은이들이 외금발로 뛰기, 음란성을 띤 조롱, 여성이 행사를 주관하는 점 등- 의 마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던 그리스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더구나 그리스인들이 식후 행사로 드라마를 연출하는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스 안에서 더욱 꽃피게 된다.
제의(ritual)는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춤의 영향을 지니고 자신들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은유로서 표현되는 예술로서 제의의 재현은 현실과 그 현실의 모방을 위한 상징들의 관계를 지닌다. 제의의 창조력은 우리 안에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신비한 것을 더욱 신비와 결합시키고 알 수 없는 것을 평범한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은 채 조명하기도 한다. 춤 예술이 공적인 삶의 측면에 강하게 작용하여 소통의 표현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러한 제의가 축제라는 한 측면을 통해 사회가치의 통일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고대인들은 ‘축제에서 영적인 혼을 완전하고 조화롭게 구현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사회의 구체적 형상을 생생하게 경험함과 동시에 명랑한 기분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의의 원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고대에 행해졌던 축제로는 ‘디오니소스 축제’와 ‘아폴론 축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장려되었고 디킨스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적인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 제의’와 ‘아폴론적 판아테나이아(Pan-Athenaia) 제의’를 대표적으로 들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광적인 인기를 끌었던 제의는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이다.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광적이며 무모하고 음란한 행동을 의미한다. 이 축제는 주로 한겨울에 행하여졌지만, 열광한 여성들이 등불을 들고 언 숲 속을 뛰어갔을 정도로 사실상 봄의 제의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춤의 신 ‘니진스키(Vaslav Nizinskii)’의 춤처럼 얼어붙은 황야에서의 광적인 주문을 외우는 축제가 법과 질서를 해친다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플라톤의 <법률(Nomoi)> 제 2장에서 다루어지는 이들 축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그는 축제의 구분을 나이에 따라 나누었다. ‘뮤즈의 축제’는 어린이들로 구성되었고, 30세 이하의 남성들에게는 ‘아폴론 축제’를 섬기게 하며, 30~60세 사이의 시민들은 ‘Dionysos 축제’를 섬긴다. 이성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연령대에 속한 이들만이 술의 신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기며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축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디오니소스 제의 외에 곡물과 농업에 관련된 신인 데메테르(Demeter)와 땅속 지하 세계의 신인 페르세포네(Persephone)에게 헌신하는 풍년 제의는 매우 장엄하게 치러진다.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는 여성들에 의해 치러졌고,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위한 제의의 경우는 참가자가 귀족 부인들로서 분위기도 엄숙하고 순수하였으며, 비밀리에 거행된 행사였다. 이들 고대의 축제인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그리고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제의에서 추어진 ‘축제의 춤’은 자신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표현되는 예술로서 현실의 모방을 위한 상징들의 관계를 삶의 측면에 강하게 작용하며 의사소통의 표현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플라톤은 <법률(Nomoi)> 제 7장에서 축제 이외의 여러 춤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디오니소스 축제(Dionysia)’는 고대 아테네에서 디오니소스 신을 경배하며 벌인 큰 축제로, 주요 행사로는 비극과 희극의 상연이 있었다. 이 축제는 ‘판아테나이아(Panathenaia) 축제’ 다음으로 중요한 축제였다. 또한 이 축제들은 ‘디오니소스 비의(Dionysian Mysteries)’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결과 ‘디오니소스제는 크게 두 종류- ‘시골 디오니소스(Rural Dionysia)제’와 ‘도시 디오니소스(City Dionysia)제’- 로 대별되면서, 각각의 구(demes)에서 독립적으로 치루어 질 만큼 융성하였다. 이 둘은 각각 일 년 중 다른 날 진행되었다. 또한 이 축제들은 ‘디오니소스 비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시골 Dionysos 축제’는 원래 아티카의 엘레우시스 지역(Eleutherae)에서 포도나무의 재배를 기념하던 것이었다(아주 오래된 축제로써, 아마 원래는 디오니소스와도 관련이 없었던 듯하다). 이 축제는 포세이돈의 달(Month of Poseideon, 12-1월)인 겨울에 열렸다. 중요 행사는 남근상(phalloi)을 들고 다니는 환락의 도시 ‘폼페이 행진’이 있었다. 이 행진에는 또한 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kanephoroi), 기다란 빵 덩어리를 든 사람(obeliaphoroi), 기타 제물을 든 사람(skaphephoroi), 물 항아리를 든 사람(hydriaphoroi), 그리고 포도주 항아리를 든 사람(askophoroi)들이 함께 하였다. 이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와 그 제의에 관련된 것들이다.
‘폼페이 행진’이 끝난 뒤에는 춤과 노래의 경연이 있었고, 코러스들은 디튀람보스(dithyrambos, 그리스의 신 Dionysos의 제사에 사용된 노래)를 공연하였다. 비교적 큰 마을에서 열렸던 축제에선 ‘도시 디오니소스축제’에서 상연되었던 극시를 상연하기도 하였다. 아티카의 여러 마을에서 서로 다른 날에 축제를 열었던 까닭에 구경꾼들이 한 번에 여러 축제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에겐 아테네 도시 밖을 여행할 기회이기도 했다. 극시 연기자들이 축제기간 중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도시 디오니소스축제’ 또는 ‘대 디오니소스제’라고도 불리는 이 축제는 도시에서 열린(아테네에서 열린) 축제로 기원전 6세기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BC. 600?~BC. 527) 시절에 정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축제는 시골 축제가 끝나고 3개월 뒤인 3-4월에 열려, 겨울이 끝나고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전설에 따르면, 엘레우시스 지방이 아티카(Attica)에 귀속될 때 그곳 사람들이 아테네에 디오니소스 신상을 선물하였는데, 아테네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디오니소스 신이 전염병(성병)을 내렸고, 잘못을 빌고 디오니소스 종교를 받아들이자 치료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축제의 행진에서 ‘남근상’을 들고 다니는 것이다.
이 ‘도시축제’는 상대적으로 나중에 생긴 것이고, 집정관(종교행사를 감독하던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통제 지휘를 받았다. 집정관은 선출되자마자 ‘도시 디오니소스제’를 준비하기 위해 축제 기획자를 임명하였다. 축제의 첫째 날엔 시민들과 외국인 거주자(metics), 아테네 식민지의 대표들이 디오니소스 엘레우테레우스(Dionysos Eleuthereus, 자유로운 자)의 나무 신상을 들고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폼페이 행진을 하였다. ‘시골 디오니소스제’와 마찬가지로 이 행진에는 남근상을 든 사람, 바구니 든 사람, 물 항아리, 포도주 항아리 든 사람이 함께 하였다. 제물로 쓸 황소 또한 같이 행진하였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 제국의 전성기 때엔 갖가지 공물들과 무기들이 아테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행진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행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화려한 옷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걷는 ‘코레고이(Choregoi, 코러스 지휘자)’였다. 폼페이 행진이 끝나면 지휘자는 코러스를 이끌고 ‘디튀람보스 경연’에서 승부를 다투었다. 경연이 끝나면 제물로 쓰려고 끌고 온 황소를 잡아 시민들과 나누어 먹었다. 길거리에서 술 난장판을 벌이는 두 번째 행진인 ‘코모스(komos, 이에 대해 항목을 설정하여 설명됨)’가 그 이후로 진행되었다.
둘째 날 극작가들은 상연할 작품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리고 경연의 순위를 정할 심판들을 추첨으로 뽑았다. 축제 기간중 5일은 극시 상연을 위해 배정하였다. 그 중 3일은 비극의 상연을 위해 쓰였고, 하루에 한 작가의 3개 비극, 1개 사튀로스극(Satyr play, 고대 그리스 시대에 그리스 비극과 함께 상연된 연극)을 상연하였다. 집정관들과 심판들은 디오니소스 극장 맨 앞줄에서 관람을 하였다.
나머지 두 날은 기원전 487년부터 희극의 경연 참여가 허용되기까지는 디튀람보스 경연을 위해 쓰였다. 다섯 명의 희극 작가들은 각자 하나씩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 희극들이 하루에 연달아 상연되었는지, 아니면 5일에 걸쳐 상연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희극은 중요성 면에서 부차적인 것이라 여겨졌음에도(비극에 비해?), 우승하는 것은 아주 큰 영광이었다. 대 디오니소스제 보다 앞서 열린 축제 ‘레나이나 제전’에선 희극 공연이 더욱 중시되었다. 기원전 416년 겨울, 비극작가 아가톤이 주신인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벌어진 비극 경연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것을 기념해 아테네 명사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 <향연>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곧장 디오니소스 신 자체는 그리스의 전통적 신화 체계 속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변두리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신을 기리는 디오니소스제는 어떻게 그렇게 융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디오니소스 신이 올림포스 신들의 체계가 확립된 후 다른 문화권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먼저 원초적 신격으로 주신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성과 질서를 존중하는 새로운 만신전에서 그 자리를 ‘제우스-아폴론-아테네’ 신들에게 내어주고, ‘데메테르-포세이돈’과 함께 변두리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오르픽(Orphicism) 종교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본래 파네스(Phanes, 빛나는 자, 나타나는 자)로서 태초부터 주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신은 기능적 관점에서 작동하는 그리스 신화 체계의 특성상 질서와 ‘노모스(Nomos, 법과 관습을 지칭하는 희랍어)’ 확립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대에 그 중요성이 감소되었다가, 질서가 확립된 후에는 오히려 특정의 기간 동안 그러한 질서가 유보되는 일탈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시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디오니소스제’와 다시 결합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디오니소스 신화 및 의식은 구신석기의 신화와 의식이 지니는 특성과 청동기의 신화와 의식이 지니는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332년쯤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이후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는데, 로마 제국 전체에서 아주 부유한 도시의 하나로 손꼽혔던 곳이다. 8세기경 지진에 의해 흙 속에 파묻힌 이곳은 19세기에 발견되어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제라시에는 20만평이 넘는 넓은 언덕에 웅장한 석조건물 유적이 펼쳐져 있다. 지하의 완벽한 하수도 시설과 두 개의 야외 원형 극장, 여러 신전들(제우스 신전, 디오니소스 아데미 신전 등)과 1천평이 넘는 대규모의 목욕탕 두 개, 대형 경마장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 신전은 비잔틴시대에 교회로 사용 되었다.
<다음호 계속>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