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50)

제우스와 세멜레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50)

 

가면을 벗김과 자아에 대한 내면적 탐구

 

남태우

지금까지 살펴 본 디오니소스 신격의 세 모습 속에서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특성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즉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는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 ‘zoe’라는 생명력을 일상생활의 삶과 제도 속에 구현시키는 Eniautos Daimon으로서의 디오니소스, 가면과 드라마의 신으로서의 디오니소스의 모습들 속에서, 특정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 초월하게 해주는 생명력 내지 욕구를 지닌 디오니소스 신의 철학적 특성이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생명력은 디오니소스가 벼락을 맞아 죽은 어머니 세멜레의 몸에서 꺼내져 아버지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다시 태어남을, 또는 티탄의 죽은 재에서 다시 부활(palingenesis)함을 묘사하고 있는 신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 넘어 삶의 세계로 들어오는 힘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를 건너 뛴 이러한 힘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에로 초월하는 힘 반의 원천이 된다. 만약에 인간이 역사 속에서 감각적으로 자명하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 보이는 세계, 현실의 세계, 모든 것의 자기 동일성이 확연히 구별되는 정상적 질서의 세계에만 갇혀서, 경험할 수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이상적 관념의 세계, 모든 것이 해체되어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는 미구분의 무질서의 세계에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인류는 실용적 기술과 지혜는 어느 정도 발달시킬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정신문화는 오늘날만큼 발달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멜레

그러나 특정의 기간 동안에 다른 세계에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옴, 또는 가면을 썼다가 다시 벗음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디오니소스제’ 같은 종교의식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에로 들어가기만 하면, 또는 신들린 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지혜롭고 참다운 존재(Ekstasis)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그리스 비극이나 희극을 관람하기만 하면, 저절로 영웅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가 ?

참다운 존재가 됨, 또는 내면세계의 승리자인 비극적 영웅이 됨은 사실 그 특정의 기간에 단순히 그러한 행사에 참여함을 통해서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계속하여 철학적인 내적 성찰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적 성찰은 우리가 가면을 벗고 난 후에, 그 가면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 가면의 어떠한 속성에 자신을 동화시켜야 되는지에 대한 탐구 즉 그 가면의 속성에 대한 벗겨냄 또는 들추어내는 작업 자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가면 들추어내기는 정적으로 고정된 모습으로서의 가면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역동적인 모습의 가면이기 때문에, 내면적 자아에 대한 탐구내지 인식의 작업이다. 이러한 내면의 탐구를 우리는, 앤더슨(Daniel E. Anderson)이 주장하였듯이 자아 발견, 자기 창조의 도구라는 의미에서의 플라톤적 대화술내지 변증술(dialektike)과 동일시 할 수 있다.

 

결국 디오니소스 신화와 종교의식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오늘날 습관화된 종교, 타성적 인생살이의 졸음을 조는 현대인의 어깨를 심하게 쳐줄 죽비와 같다. 물론 죽비를 맞았다고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 속으로의 입문은 비달 나께(Vidal Naquet)가 있듯이, 실존적 영역의 존재론적 전이(mutation ontologique)라고 할 수 있는바, 그러한 전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 갈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아직 잠들어 있는 자가 어떻게 현실 세계의 졸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Eleutheros) 디오니소스를 따라, physis/nomos, 선/악, 인간/ 비인간, 현실/ 몽상의 구분을 뛰어 넘어, 심지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을 뛰어 넘어, 그러한 대립 항들을 하나의 단일성 속에서 감싸 안아버리는 저 열려 있는 공간으로 초월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 황홀경, 육체적 만족감의 여사제들, 마이나데스

 

디오니소스는 신성모독을 한 신이며, 포도주의 신이자 광기와 도취, 열광,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 신이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가 있었다. ‘오르페우스교(Orpheus-敎)’와 깊은 관련을 가진 이것은 주로 부녀자들이 살아있는 산짐승이나 가축, 혹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일종의 광란에 빠진 상태에서 이 제물들을 산채로 뜯어먹고 그 피를 마셨다. 그리스의 비이성적인면을 보여주는 ‘디오니소스교’는 현대에 와서 고대 그리스의 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그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오르페우스교’는 기원전 7세기 무렵에, 고대 그리스에 퍼져 비밀의식을 행하던 종교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Orpheus)를 종조(宗祖)로 하며, 인간은 진정한 영혼이 사악한 육체에 잡혀 긴 윤회의 업(業)이 계속되므로 금욕생활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르페우스는 오르페우스파(오르페우스교)라는 비교적인 색채가 강한 종파의 창설자라 알려진다.

원전 6세기경에 그리스에서 번성한 ‘오르페우스교’는 ‘오르피즘(Orphism)’이라고도 하며, 오르페우스를 믿는 일종의 종교이다. 미트라(Mitra)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혼은 신으로부터 나오며 소멸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순수함을 간직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들의 의식에는, 옛날 ‘마이나데스(Dionysos Mainades)’가 그들의 가상의 주인을 찢어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짐승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오르페우스교 신화의 중심에는 디오니소스가 있지만, 오르페우스 자신은 아폴론의 숭배자였고, 오르페우스교 사람들의 생활 방식 역시 지극히 아폴론적이었다. 오염된 영혼을 정화시키고, 인간을 신의 위치로 상승시키며, 영원불멸의 내세를 보장해주었다. 운명과 신의 개입의 알리바이를 강조한다. 이른바 ‘오르페우스의 추종자’들은 의식적 정화의 열렬한 신봉자이며, 윤회의 형태를 믿고,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특히 디오니소스 신에게 헌신적이다. 약간 변종되어 ‘마이나데스(Mainades)’들이 추종하는 ‘디오니소스교’로 된 것 같다.

<디오니소스의 무녀들의 환락상태>

‘디오니소스교’에서는 여자들이 디오니소스 신과 사랑에 빠진다. 마을을 버리고 숲과 산으로 떠돌아다니던 여자들을 일컬어 ‘마이나데스(Mainades)’라 부르며, 이는 ‘마니아(Mania)’에 빠진 여자들이란 뜻이다. ‘마니아(man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mania’와 같으며, 미칠 듯한 사랑과 증오나 분노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어인 ‘광기(狂氣)’를 뜻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정서적 감수성이 예민하며, 직관적인 인지능력이 발달된 이유로 대개가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에 대해 쉽게 혹해서 ‘마이나데스’가 되기 쉽상이다.

디오니소스 신은 양성적이며 문명과 자연의 전이 지대에 거주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디오니소스의 상징물로는 덩굴성 식물과 메꽃, 야생동물과 뱀 등이 등장한다. 염소부족인 사튀르스 부족의 노현자인 실레노스에게서 지혜를 배운 자, 말하자면 디오니소스의 신성과 지혜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그리스 예술정신의 큰 에너지로 생각했다.

원초적 자연으로서의 디오니소스적 힘은 시각적인 가상을 만들어 내는 아폴론적인 힘과 대칭점이며, 절제되지 않은 충동 자체, 질서 잡히지 않은 열정들, 열광적인 도취를 불러일으키는 자연적 생명력의 다른 이름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가상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다.

 

디오니소스는 일종의 문명 해방 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신이다. 법과 규율, 질서와 규정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그 바깥으로 질주하게 만드는 위험하고 불온한 신이다. 이러한 시각은 신의 세계와 통치자들의 입장에서 그러하다는 가설이 전개될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연이며, 고통이자 축복이고 타자를 먹는 게 아니라 자신을 먹는 것이다. 슬픔과 기쁨은 분리되지 않고 공포는 평화와 분리되지 않는다. 나와 세계는 분리된 것으로 알지만 존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씨실과 날실로 짜인 거대한 천과 같다.

이렇듯 술 취한 신 디오니소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문명에 갇힌 자들이 길들여진 타성적 인생살이를 반성하게 한다. 실존적 영역의 존재론적 전이는 현실 세계에서 설정된 가상의 이미지에 갇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차치하고 그리스 신화에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수행하면서 추종하는 여사 제들을 ‘마이나데스(Mainades)’, 또는 ‘마이노메도스(mainomenos)’ 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황홀경’에 들고, 육체적으로는 ‘해방감’을 느끼는 집단이다. 디오니소스를 경배할 때 여인들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남성들은 이 의식에 합석하지도 동참하지도 못한다. 아마도 이러한 관습은 그가 뉘사산에서 헤라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여성으로 길러진 데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을 가리키는 ‘마에나드(maenad)’는 같은 어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디오니소스 자신은 미칠 듯 한 열정이라는 뜻으로 ‘마이노메도스(mainomedos)’라 불린다. 또는 이 신앙에 합류하는 야성적 숲의 이름을 따서 ‘실레니(Sileni)’, ‘사뉴로스’, 바쿠스의 시녀들이라는 의미의 ‘바사리드스(Bassarids)’ 혹은 가장 흔히 ‘바코이(Bacoi)’라 하였다. 이 밖에 ‘바케(Bakche)’ 또는 ‘바카이(Bacai)’, ‘티아데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단수(單數)로는 ‘마에나드(maenad)’이고, 복수로 ‘마이나데스(Mainades)’는 ‘광란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등나무를 엮어 솔방울을 단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노래하고 춤춘다. 또한 표범 등 짐승의 가죽을 걸친 그녀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관(冠)을 쓰고, 한 손에는 뱀이나 포도송이를, 또 다른 한 손에는 ‘티르소스(thyrsos)’라고 하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표지(標識)인 지팡이를 든 채 노래하고 춤추면서 산과 들을 뛰어다님으로써 인간의 습관이나 두려움을 잊고 지냈다. 그녀들의 몸속에는 신의 영력(靈力)이 넘치기 때문에 괴력을 발휘, 나무를 뿌리째 뽑는가 하면 야수를 갈가리 찢어 생식하기도 하였다.

에우리피데스 <바케>(BC 5세기)에서 “디오니소스 신의 여사제가 바위에 지팡이를 꽂자, 물이 나왔고, 다른 쪽에서는 신의 손길이 미쳐 포도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제는 퍼서 잔치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 하셨다.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요한복음 2장) 디오니소스와 여사제들 대신에 예수와 유대인 여인네 몇 사람으로 완벽히 그대로 표절되었다.

<엑스터시에 빠진 디오니소스의 여사제>

위의 그림은 상아로 장식한 막대기를 든 디오니소스의 여사제가 포도주의 황홀경에 빠진 채 고개를 숙이고 춤추고 있다. ‘디오니소스 제전’이 되면 평소에 하던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억눌렸던 감정을 다 표출해버리며, 광적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디오니소스 축제는 여성해방을 촉진시키는 최초의 운동에 해당된다.

<엑스터시에 빠진 디오니소스의 여사제>

디오니소스는 정신적 해방과 육체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 여사제들을 거느리고 리디아(Lidia), 프리자아(Frisia), 그 밖의 동방 여러 나라를 포교 원정을 떠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녀들은 디오니소스 숭배의 본고장인 트라키아나 프리지아에서 디오니소스 제례가 있을 때면 열광적으로 난무(亂舞)하는 여신도들의 신화적 반영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제례를 ‘오르기아(orgia)’라 하고, 짐승을 생식하는 제식(祭式)을 ‘오모파기아(omophagia)’라고 한다. 이런 제례는 일종의 밀의(密儀)로서, 사람들은 이 의식이 행해지는 동안 자기 속에서 신을 느낌으로써 일상의 습관이나 금기에서 벗어나 자연과 일치하는 감정으로 생활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원시생명의 체험이기도 하였다.

성년이 된 디오니소스는 포도주를 주조하는 법을 터득하여 이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즐기게 했다. 그러나 헤라의 저주로 인하여,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 이집트와 시리아를 정처 없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이에 동참하여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통칭 ‘마이나데스’로, 그 집단의 명칭은 ‘미치광이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마이나데스’로부터 오늘날의 ‘마니악(maniac)’이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마이나데스’라고 불리는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 중에는 상반신은 인간이요, 하반신은 동물인 사튀로스(Satyros), 왕성한 성욕과 생식력을 지닌 프리아포스(Priapos) 등이 있다. 이들은 고대인들의 왕성한 성욕을 반영한 추상적 매체로, 사튀로스의 하반신이 동물인 것과 생식력의 신 프리아포스가 ‘발기한 채로 서있는 거대한 남근’을 품고 있는 것은 그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열망’을 의미한다. 디오니소스의 시종으로 반인반수인 사티로스(Satyros)들이 마음껏 술을 마시며 흥겨워하고 있다.

디오니소스 신앙의 핵심은 ‘술과 축제’이다. 이는 일상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되고자 함이다. ‘디오니소스 축제’가 벌어지면 여신도들을 가면을 쓰고 억눌린 본능을 마음껏 풀어냈다. 그들을 ‘마이나데스’ 또는 ‘바카이(Bacchai)’라고 불렀다. 초기에는 신자들 대부분이 여성이었으나 점차 남성들도 가담하였다. 여성들이 겪는 억압이 디오니소스 신앙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티탄족들은 헤라의 명령을 좇아, 제우스가 새로 얻은 아들로, 뱀으로 된 관을 쓰고, 머리에는 뿔이 달린, 어린 디오니소스를 붙잡아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위기를 모면하려던 디오니소스의 변신도 별무소용이었다. 그들은 디오니소스의 시신을 냄비에다 넣고 끓였다. 이러는 와중에 그의 피가 땅으로 스며들어, 그 자리에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그의 육신이 이 지경으로 수난을 당했지만, 그 할머니 되는 레아는 디오니소스를 구해내고, 육신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제우스의 부탁을 받은 페르세포네(Persephone)는 그를 오르코메노스(Orchomenus)의 왕 아타마스(Athamas)와 그의 아내 이노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Dionysos를 여자아이로 위장하여, 여성들의 영역에서 기르도록 설득하였다. 이렇듯 그가 탄생하여 성장한 뒤 신으로 추앙받기까지 모두 여인들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인들에게 디오니소스의 광기는 만물의 자연스런 질서에 대한 도전을 상징했다. 포도주와 도취의 신인 디오니소스 숭배에는 의식적인 광기와 황홀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 제전은 여인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었던 많지 않은 행사 중 하나였다. 여인들은 자신의 역할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테네 외곽 산악지대에서 ‘마이나데스’라 불리는 여성 입문자들은 자신들의 평범한 삶을 버리고서 황홀경에 취해 격정적인 춤을 추며 산꼭대기를 뛰어다녔다. 그들은 디오니소스의 혼령에 취하여 그 신의 인도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테네에서는 일곱 차례 디오니소스 제전을 거행했다. 그중에는 이른 봄에 개최되는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 2~3월)’라는 포도주 마시기 축제도 있었다. 봄의 시작과 지난해 포도 창고에 보관했던 포도주의 숙성을 축하하기 위해 매년 안테스테리온(Anthesterion)에 3일 동안 열렸다.

 

첫째 날에는 새로 개봉한 술통의 술을 디오니소스에게 바쳤다. 둘째 날은 민중들 사이에 술잔치가 벌어지는 날이었지만, 아테네 정부는 레나이움의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아르콘 바실레우스(Archōn Basilius)의 아내와 디오니소스와의 결혼예식을 거행하는 비밀의식을 치렀다. 이 축제기간에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지하세계에서 올라와 지상을 걸어 다닌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악령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산사나무 잎사귀를 씹고 문에 타르를 칠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파티에서의 관례와 달리 손님들은 각자 음식과 포도주를 주인집으로 가져와 말없이 음식을 즐겼다. 셋째 날에는 할로윈 축제 같은 기괴한 만찬이 펼쳐졌다. 사악한 혼령이 거리를 배회한다고 믿었던 아테네인들은 죽은 자들에게 음식을 제물로 바쳤다. 그날 밤 모든 가족의 가장은 이렇게 외치면서 자신의 집에서 혼령을 쫓아냈다.

<다음호 계속>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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