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웃고 우는 시간이…

홀로 웃고 우는 시간이…

 

임재철 칼럼니스트

 

 

임재철

나이가 들면서 홀로 ‘웃고 우는’ 시간이 루틴이 되었다. 글 쓰고, 책 읽고, 산책하고, 가끔 지인들 만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렇다. 사는 게, 그러니까 약간의 즐거움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안다. 일상을 산책하며 말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자다 가도 벌떡 일어나 무의식중에 살며시 웃고 있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시간을 접하게 된다. 꽃은 혼자 피고 혼자 웃는다지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 같은 연유를 스스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지나치며 살아왔는데, 갈수록 더해져 철학적인 어떤 논리 이전에 조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홀로 집에 있을 때나 구글 포토에서 ‘추억 돌아보기’를 보다 가도 슬며시 웃고, 조용한 곳에 혼자 있을 때, 길을 오가다가, 가끔 멍을 때리다가도 그런 일이 많다. 하물며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 취향 깊은 노래를 들으면서도 그렇고, 누군가와 술좌석에서 담소를 나누다가도 허허 웃는 것이 아닌 홀로 히죽 웃거나 슬그머니 우는 때가 있다.

조금 더 술자리로 들어가 보면, 후덥지근한 저녁에는 지인들과 돼지갈비나 파전에 동동주 한 잔하며 지나온 날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거나 세상살이 입방아를 찧기 위해 취하고 싶은 때가 있다.

즉 취하되 인사불성일 만큼 취하지 않음이 일덕(一德)이요, 새참에 마시면 요기되는 것이 이덕(二德)이며, 힘 빠졌을 때 기운 돋우는 것이 삼덕(三德)이고, 안 되던 일도 마시고 넌지시 웃으면 되는 것이 사덕(四德)이며,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 풀리는 것이 오덕(五德)이라 하지만, 필자에게는 사덕이 와 닿는다.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達官必遵愚(달관필준우)/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먹을 사람 적은 집엔 곡식이 많고, 자식 많은 집안은 꼭 배고픈 근심이 있네. 높은 벼슬하려면 어수룩해야 하건만, 진정한 재인은 쓰일 곳이 없다네.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至道常陵遲(지도상능지)/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婦慧郞必癡(부혜낭필치), 복을 두루 갖춘 집안이 드물고, 높은 도리는 늘 힘을 쓰지 못하네.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이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사내는 어리석기 마련.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보름달이 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 불어 흩어지니, 만사가 그렇고 그렇다 하며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웃노라.

이는 정약용(丁若鏞)이 1804년 7월 유배지 강진에서 쓴 ‘獨笑(홀로 웃다)’라는 시(詩)다. 여기에서 창작된 때와 장소, 당시 국내외 상황을 치열하게 논하자는 게 아니고 단지 ‘홀로 웃는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그렇다면 겸연쩍은 미소이든, 슬며시 웃는 웃음이든 기발한 일도 없는데 일상에서 그냥 소리 없이 종종 살며시 웃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삶이 순간들이 허허로워진 걸까. 필자는 지난 수년간 다양한 글쓰기를 해왔으며, 완성도가 조금 떨어질 지언정 쉽게 쓴 적은 없었다. 그리고 글 쓰는 마음은 종종 즐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슬픈 글을 자주 썼다. 그래서 이제는 슬픈 글보다 사랑을 노래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면 그 글이 훗날 또 다른 혼자 웃는 한 방법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가난해도 웃는 사람들이 많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니 행복해지듯, 사람 사는 이치는 어제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필자는 ‘혼자 웃는 웃음’은 해피 바이러스가 아닌 예외라 여겨지며, 죽으려고 떠난 여행에서 살짝 짓는 미소처럼 사연이 많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또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감수할만한 하나의 변화라 판단된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여러 감각이 축적돼 있는 필자이긴 하나 ‘눈물’ 역시 너무 많은 한 사람이다. 허공을 보거나, 홀로 책을 보다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카페에서, 앞서 언급한 술좌석에서, 애경사 소식과 함께 참석해서 아니면 TV를 보다 가도 낮은 음으로 맨날 운다. 말하자면 무성하게 흐느끼는 게 아니고 찔끔찔끔 눈물이 나는 일이 수시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지금도 펑펑 우는 것은 천국에 계신 사무치게 그리운 모친 생각에서다.

 

인생 후반전에 자연스런 일이겠으나 눈물의 빈도가 심상치 않으니 여러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너그럽지 못해 그럴까. 아니면 자신을 되찾고 삶의 중심을 다시 만들기 위해, 세상살이 그런 거라며 마냥 외롭고 서글퍼서, 사는 게 부족해서, 실패가 너무 많아서, 세상이 아파서, 마음속에 응어리진 감정들 때문에 등등 상상 속의 나래다. 이 또한 살아가는 한 모습이겠지만 그렇다. 한편 아무 감정도 없이 무기력 하지 않음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지! 무에서 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의 행로다. 나그네 길 위에 인생이 있고 얘기가 있고 산다는 건 기쁜 일이라고 믿는 필자이기에 여하튼 나 자신과 사이좋게 나이 들고 싶다. 맨손에서 시작한 나그네로서 꼭 무엇을 어떻게 하고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고 넘어지더라도 모든 세상과 내 자신을 끌어안고 설령 매일 웃고 울어도 또다시 나그네 길을 애써 걸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늙는다. 세월 앞에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비록 감동적인 웃음과 울음이 아니더라도 곁에 있는 이들과 손을 잡고 한 번이라도 더 건강하게 웃고, 또 울어야 할 일이 있으면 울고, 서로 안아주며 가슴 뻐근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웃으면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 앞에 남은 세월! 그저 웃고 울며 바람처럼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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