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돈의 酒馬看山⑫
경국지색(傾國之色)과 더불어 사라지는 불의 노래
술이 불이 되면 자신을 태우고 나라를 불사르기도 한다. 유주망국(有酒亡國)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물로써 불을 다스리지 못하면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술이 파멸의 전부는 아니다.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보조역할에 그치는 게 다반사다. 위정자가 술을 좋아하고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경지를 즐겨할 때는 늘 여색이 함께 한다. 술의 불기운이 센 곳에는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가 곧잘 따라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애첩 말희(妺嬉),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달기(妲己)가 바로 그 예다.
물의 노래는 시(詩)나 서(書) 그리고 예술로 승화되지만, 불의 노래는 여색과 함께 파멸의 길을 재촉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럼에도 예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쾌락(快樂)과 니취(泥醉) 속으로 사라지고, 스러져간다. 그들의 커다란 야망과 세상을 뒤덮을 듯한 기개도 불의 노래를 따라 소리 없이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삶 속에 술이 있고 술 속에 삶이 있다. 술로써 삶을 망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이야기는 하(夏), 은(殷)나라에 이어 주(周)나라로 이어진다. 주의 마지막 제위를 계승한 유왕(幽王, 재위 기원전 782~771)은 본디 술을 좋아했다. 거기에 더해 절세의 미인 포사(襃似)까지 얻게 되니 정사(政事)는 뒷전이었다. 영웅호걸은 술과 미색(美色)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폭군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또한 다르지 않다. 유왕의 후궁 포사는 용녀(龍女)의 화신이라고 전해진다. 포사는 좀체 웃지를 않고 시큰둥한 모습이다. 손으로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녀의 말을 좇아 유왕은 매일 비단 백 필을 찢게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약간의 미소만 띨 뿐 웃지를 않는다. 봉화대에 봉화(烽火)를 올려 허겁지겁 달려오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웃을 것이라는 곽석보의 간언(奸言)을 따라 거짓 봉화를 올리자 그제야 그녀가 살짝 웃는다. 포사의 웃음에 매료된 유왕은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리게 되고 결국 반란군의 침입에 대응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걸주(桀紂)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외척(外戚)들과 환관(宦官)들의 권력 농단이 극심했던 후한(後漢, 혹은 東漢)의 영제(靈帝, 재위 168~189)도 불의 노래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13세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나, 환관세력의 기세에 눌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된다. 환관들과 모후인 동(董)태후에게 권력을 맡기고 오로지 주지육림을 탐하는 것이다. 옷을 입은 미녀보다 옷을 입지 않은 미녀들이 더욱 아름답게 하늘거릴 것이고 그 모습이 천상의 선녀에 버금갈 것이라 연상한 영제는 나영관(裸泳館)을 짓기 시작한다.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천여 개의 방에다 옥석과 푸른 벽돌로 계단과 전면을 장식했다.
단하에는 수로를 만들어 장관을 이루고, 궁녀들은 뿌리다 남은 향수를 버려 수로가 향수냄새로 가득 찬다. 영제는 나영관 양전(涼殿)에서 나이어린 궁녀들과 알몸으로 술을 마셨는데,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밤을 샐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술에 취해 “만년의 세월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야말로 천상의 신선이 아니겠는가”라며 불의 노래를 한껏 구가했다. 그로써 황건(黃巾)의 난을 불러오게 되고, 후한 또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5호 16국 시대, 전조(前趙)의 진왕 유요(劉曜, 재위 318~ 328) 또한 술고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도 술을 즐겨 했는데, 만년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고. 낙양성 전투에서 긴장이 해이해지자 다시 술을 마시게 된다. 이때 적군인 석륵이 반격해오니,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스스로의 삶은 물론 나라까지 잃게 된 것이다.
술은 상극인 물과 불이 함께 하기에, 그 가는 길 또한 극과 극을 나타낸다. 불이 붙게 되면 활활 타오르고 나중에는 모두 다 사그라지고 재만 남는다. 어차피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지만, 불의 노래는 그래도 부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권좌(權座)에는 미녀들이 있게 마련이고 술에도 여자들이 따르는 것은 불변의 이치다. 그들의 불의 노래는 한 순간을 불사르는 아픔과 회한(悔恨)의 노래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언론계와 국회 당, 공기업 임원 등을 두루 거친 뒤 지금은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과 KAIMA 전무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