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술을 마시며 즐기는 풍토는 고대로부터의 산물

한국의 음주문화①

 

한국인이 술을 마시며 즐기는 풍토는 고대로부터의 산물

술, 유럽에선 ‘음료’로 우리는 ‘관계’ 형성하는 특수 ‘물질’로

 

 

조 성기(아우르연구소 소장/경제학박사)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은 음주가 인간에게 행복도 주고 불행도 동시에 준다는 것이다. 음주문제에 대한 대책은 불행을 줄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적정음주를 하면 편안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과음과 폭음을 일삼는 경우 해로움과 불행이 커진다. 술로 인한 폐해와 불행을 줄이는 음주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1965년 이후 술 소비가 크게 늘었으니 술에 대한 경각심은 그 이후의 일이 된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음주문제가 마찬가지 속도로 늘어 일반적 사회상황이 되었다. 주로 음주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 사고, 질병, 정부당국의 일 등으로 집계되는 음주문제도 크게 늘었다. 그 증가속도는 성장속도와 같이 빨라 언제부터 대응을 해야 할지 정책당국들도 음주자들도 사회도 정신 줄을 놓았었다. 술로 인한 폐해를 줄이려는 생각은 2000년이 들어서야 정부, 민간 활동주체들의 일이 된 셈이다. 그 이후 각각 나름 활동에 나서고 있다. 술문제 해결의 21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2001년 보건당국이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와 함께 알코올상담센터를 전국적으로 설치하고자 의사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최초 4개 센터가 서울, 대구, 광주 등에서 시작했다. 필자가 보건당국과 함께 신청기관을 받는다는 공고를 내자 전국에서 80군데가 설치를 원했다. 그것도 그 간절성이 크다. 주무과장과 필자가 밤새 서류분류작업을 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 당시 보건당국의 담당과장이 강력히 주장하여 그 사업이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초기에는 인식과 자금부족으로 4개 센터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나중에 이 사업이 지역의 문제를 줄이고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정부가 개입했기 때문에 그 확산이 가능했다.

주류의존자자조집단인 AA는 오래전부터 활동해 왔지만 2000년대 들어 전보다 활성화되었다. 1997년 학생들과 교수들이 시작한 민간의 자생적 예방단체 ‘한국대학생알코올문제 예방협회(BACCHUS Korea)’가 또래 리더양성 중심의 교육홍보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사업은 각종 예방프로그램의 개발로 이어졌다. 초기 재원은 주류업계의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예방프로그램 개발에 주류업계의 재원이 의미 있게 쓰였다고 볼 수 있다. 2005년에 ‘음주예방제로넷’이 결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부문 보다는 민간이 먼저 예방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2006년에는 정부차원의 종합대책인 ‘파랑새 플랜’이 발표되었다. 정부의 정책재원이 ‘대한보건협회’에 지원되면서 예방사업이 증가하였다. 2000년 시작한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의 예방사업은 정부사업이 확대된 이후 병원과 재활사업으로 방향을 틀고 축소되었다. 예방활동은 전국의 상담센터에서 부분적으로 실시한다. 한국의 음주문제예방사업은 아직 미흡하고 전국에서 간헐적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보건소’들이나 지역의 ‘정신보건센터’들 역시 미흡하나마 음주문제예방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97년 이후 주류업계가 특별재원을 조성, 2000년에 전문기관을 설립하여, 음주문제 예방 및 치료재활사업에 직접 뛰어 들었다. 주류업계가 추진하던 이 사업들은 오랜 논의 끝에 2015년 들어 가톨릭계 기구로 위양되었다.

한국의 음주문제 대책을 논하려면 한국인의 음주유형, 음주에 대한 인식, 태도, 가치관 등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가 추진한 규제정책들의 효과성도 검토해야 한다. 그 결과는 한국인의 음주패턴과 음주문화에 적합한 대책을 찾고, 타국과의 차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정부는 대부분의 타국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통제정책을 선호한다. 그런데도 금주모델 보다는 절주모델을 선호하고 있어 음주에 긍정적인 아시아의 전통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즉, 정책과 실행프로그램의 선택에서 이중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정부의 절주모델은 그 용어와 실행과정에 혼란이 있다.

절주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게 마신다는 의미가 일반적이다. 술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덜 마신다는 의미다. 금주는 아예 마시지 말라는 뜻이다. 절주 모델을 표방하나 왕왕 금주를 지향하는 의사결정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보건관련 전문가가 정책자문을 하는 시기에 그 같은 경향을 가진 정책이 공표된다.

보건당국의 자료를 보면 정부는 주로 음주문제의 전반적 크기를 줄이는데 중점을 둔다. 한국에서 음주정책의 평가와 관련된 연구가 적어 정책수단의 효과성 정도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가에 전문가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질적인 전문적 의견이다.

최근 음주문제와 음주량, 소비자들의 인식, 태도와 가치관들의 변화, 정책의 효과성 등에 대해 검토한 결과가 일부 발표되기도 하였다. 주로 주류관련 연구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다. 그 결과 들을 보면 포괄적 규제정책의 효과가 적어 한국에서는 음주패턴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문제해결의 타깃을 선택하여 변화관리를 하는 전략적 개입방식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음주역사 : 술은 ‘음료’ 보다 ‘관계’

 

많지 않지만 음주에 대한 고대의 기록이 한국에 있다. 한국인들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술을 즐겨왔다. 고대 한국인의 음주습관은 상고시대로부터 조선왕조 초기까지 계속된 제천행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이 술을 많이 마시고 함께 즐기는 풍토는 고대로부터의 산물이다. 고대 부여는 영고, 고구려는 동맹, 동예는 무천 등 제천행사를 지냈다. 음주는 제천행사에서 한국인이 춤과 함께 즐기며 하늘과 소통하는 행사였다.

삼국시대에도 술은 중요한 사교의 자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만취한 하백의 딸 유화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어릴 적 습관적 자신의 만취습관을 없애고자 애마를 죽였다. 신라 경순왕은 포석정에서 견훤의 군사들에게 음주 중 죽임을 당한다. 백제의 의자왕 또한 주색을 탐해 국력을 손상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 포석정에서는 왕이 술잔을 신하에게 물길을 통해 전달하고 이 술을 마신 신하는 다시 마신 잔에 술을 따라 다음 자리의 신하에게 권했다. 독특한 권주놀이다. 놀이음주의 하나로 보인다. 한국의 수작문화는 한국인의 춤과 놀이음주가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을 보여준다. 서로 권하는 행위는 각자 자기 잔의 술을 마시는 자작, 혼자 마시는 독작문화와 대비된다.

또한 불교의 승 원효는 저자거리에서 음주를 하며 불법을 전파한다. 민중과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데 술은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이 기록은 신라시대에 일반대중도 술에의 접근성이 어렵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3세기 초 고려에는 정부가 운영하는 관영주점이 있었다고 한다. 불교의 사원인 절에서 여관도 하고 술도 판 흔적도 보인다. 서양의 가톨릭교회가 술을 전매하며 재원을 조성한 사실과 유사하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인 정권이다. 전국에 산재한 사원의 경제를 담당하는 것이 주류산업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몽골의 소주가 전래되어 외래주의 제조기술이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다. 몽골침입 이전에 소주가 생산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 양이 극히 적었다. 전래된 몽골소주의 명칭은 개성의 ‘아락주’였다. 몽골군의 병참 기지였던 개성, 안동, 제주지방을 중심으로 증류식 소주가 제조되었다. 안동소주, 제주의 고소리술 등이 그 잔재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술의 소재인 누룩을 의인화한 것이다. 술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도 설명하고 있다. 술의 이점과 폐해에 대한 인식은 오래전부터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토속주가 각 지방에서 생산되었다. 전국의 길목에 밥과 술을 판매하며 여관업을 하는 주막이 생겼다. 이는 유럽의 술집(Tavern)과 유사하였다. 술로 인한 폐해를 막고자 세종대왕은 1433년에『계주교서』를 발표하였다. 기록과 가뭄으로 흉년이 들 때 금주령이 내려지는 경우가 수차례 있었다.


술의 문제에 대한 인식과 술에 대한 정부개입의 증거가 문헌에서 확인된다. 세종시절에는 향음주례가 발표되었다. 주된 내용은 술잔을 씻어서 돌리기, 받은 술은 한 번에 마시기, 접대에 대한 보상은 다음 번에 하기 등 위생과 적정음주의 규범, 음주예법 등이 적혀있다. 동시에 한 번에 마시고 잔을 씻어 돌리는 방식은 다른 조건과 합쳐져 폭음문화의 단초가 된 것이 아닐까. 금주령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있었지만 조선왕조에 와서 전보다 늘었다. 영조 때에는 수차례나 되었다. 심지어 영조는 금주령을 어긴 관리를 사형시켰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에 주세령이 내려지자 민간의 가양주 생산이 상당부분 중단되었다. 한국의 사원과 주막 등에서 판매용 술을 생산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민간 집집마다 비매용 가양주가 생산된 것이다. 민간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누룩을 사용하여 약주를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가양주의 생산이 중단되고 주세수취를 강화한 일본의 총독부가 주세를 통치자금과 대륙침략의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점령에 대한 울분과 전쟁 속의 긴장으로 폭음습관과 2차, 3차를 가는 특이한 음주문화가 생겨났다.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이후 미국군정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서양의 위스키가 유입되었다. 이때 이후로 위스키는 비싸고 좋은 술로 인지되며 한국의 술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0년대 – 1970년대 고속성장시대에 소득의 증가로 주류소비가 늘기 시작한다. 경제성장기 정부는 흉작이 들자 쌀과 보리 등 양곡을 원료로 하여 제조한 주류의 생산을 금지했다(1965년 1월). 그 결과 고구마와 감자 등의 곡류로 만든 발효주정을 원료로 사용한 희석식 소주가 대량생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값싼 증류주시대가 한국시장에 등장한다. 그 이후 소주는 전체 애주가가 택하는 술이 되었다. 생맥주가 본격적으로 출시되어 맥주소비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소주만이 국민주라는 호칭은 어색하지 않았다.

1980년대 대외 개방이 가속화되자 수입위스키와 맥주가 일반 보급되기 시작한다. 1988년 이후 쌀 막걸리의 제조가 다시 허가되자 단식증류 소주인 전통주 등의 생산도 재개되었다. 한국의 전통제조방식을 사용한 단식증류주는 최근에도 소량 생산 유통되며 시장규모가 크지 않다. 한편 소주제조사들의 노력으로 국산소주가 외국에 수출되어 한국의 희석식소주의 판매 공간이 확대되었다.

고속경제성장의 결과 소득수준이 지속 팽창하자 음주량도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0년 후반부터는 청소년과 여성의 음주가 매우 크게 증가하였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술이 전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해외의 수입 주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기존의 소주와 맥주시장의 아성을 넘보지 못하였다. 한·칠레 FTA체결 이후 저가 와인의 소비증가는 폭발적이고 연이은 유럽과의 FTA 체결 이후 대형할인점의 가정판매용 소주를 능가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시장의 주력 술은 소주와 맥주다. 소주의 원료인 주정은 과거와 달리 시장개방 이후 태국산 고구마인 타피오카와 수수, 쌀보리, 밀 등으로 만들었다. 이 곡물들을 발효시켜 막걸리를 만들고 연속 증류시켜 순 알코올농도 95% 이상의 에탄올인 주정을 제조한다. 이 주정에 물, 당, 아미노산 등 첨가물을 넣어 만드는 한국소주의 제조방식은 세계주류시장에서도 독보적이다.

21세기 들어 술이 다각화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넘자 고급주와 외국산주류에 대한 선호가 늘고 있다. 그러나 중산층과 빈곤층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소주와 맥주를 선호한다. 건강인식의 증대와 여성의 사회화와 소득증가에 따라 여성의 선호에 맞추어 소주의 低度化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술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은 전혀 불필요해졌다. 저도소주는 과실맛 소주로 변해 시장변화를 유인하고 있다. 도수의 파괴로 소주의 정체성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한국의 술역사도 타국과 같이 길다. 한국인은 술을 하늘과 인간, 인간들의 소통수단 뿐 아니라 건강용도로도 사용한다. 그래서 약주, 약술개념이 있다. 한국에서 술은 화폐, 정부와 사원 경제, 일제강점기의 군비마련 등 정부의 정책수단으로 활용되어왔다.

현대 한국인의 특징적인 음주관행은 분명 역사 속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 탄생되었다. 음주문제가 생기더라도 문화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2차 3차 등 하루에 여러 번 마시는 음주행위나 수작문화 등은 독특하다. 수작문화는 ‘술’이 아니라 ‘정’을 나누는 행위라는 해석도 있다. 한국인에게 ‘술’은 식수부족으로 ‘음료(Drink)’ 구실을 했던 유럽과 달리 ‘관계’를 형성하는 특별한 ‘물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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