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55)
무시무시한 문지방을 넘을까 두려워, 아폴론의 여사제는 미래를 알려고 하는 아피우스의 열망을 식히려 속임수를 썼지만 허사였다. 여사제는 말했다. “로마인이여, 진실을 알고자 하는 주제넘은 희망이 어찌하여 그대를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파르나르소스의 골짜기는 소리를 잃고 자신의 수호신을 묻었다오. 영감의 숨결이 나오는 출구가 막혀 숨길이 먼 나라로 옮겨갔거나 파토(델포이 옛 이름)가 이방인의 햇불에 타 버리자 그 재가 거대한 동굴로 흘러 들어가 포이보스(아폴론의 별명)의 통로를 막았거나 하늘의 뜻이 델포이를 입을 닫았거나- 그대의 나라에 위탁된 옛 시빌의 예언이 감추어진 미래를 알려주지 않더이까?- 자신의 신전에서 죄를 용납하지 않는 아폴론께 우리 시대에는 예언을 받기에 합당한 자를 찾지 못하신 탓일 게요.”
여사제는 예언 능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두려움조차 자신이 부인하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었다. 둥근 고리로 여사제 이마 위의 머리털을 감싸고 등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흰 끈으로 묶고 포키스의 월계관을 그 위에 씌웠다.
그래도 여사제가 머뭇거리자 사제가 그녀를 억지로 신정에 밀어 넣었다. 안쪽 신전의 신탁실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던지 여사제는 입구에 멈추어 서서는 영감을 가장해 가슴도 움직이지 않은 체 거짓을 내뺕었다. 자신의 마음이 신선한 광기에 사로잡혔음을 입증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도 없었다. 여사제는 거짓 예언을 듣는 아피우스 보다는 신탁소와 아폴론에게 해를 끼칠까 봐 염려했다.
여사제의 말은 전율의 울부짖음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고, 목소리는 널따란 신탁실을 채울 힘이 없었으며 머리털이 쭈뼛 솟아올라 월계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고, 신전 바닥이 진동하지도 나무가 떨리지도 않았다. 이 모든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자신을 아폴론에게 내던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에피우스는 신탁이 침묵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격분하여 소리 질렸다. “더러운 계집, 신탁실에 들어가 멈추어 서서 공포에 빠진 세상의 격한 소리에 관하여 입을 열지 않으면, 나 자신이 또한 네게 가장하는 신이 너에게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마침내 겁에 질린 여사제가 삼각대 위에 올라갔다.
여사제는 커다란 큼 가까이 다가가 멈추었다. 수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살아있는 바위의 영감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그녀의 가슴이 신성한 힘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아폴론이 델포이 여사제의 가슴을 지배했다. 아폴론은 전과 다름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옛 생각을 몰아내고 본성을 이끌어 내어 심장을 다스렸다.
목구멍에 신이 들린 채 여사제사 신탁실을 뛰어다닌다. 비쭉 선 머리털에서는 아폴론의 끈과 월계관이 벗겨지고, 여사제가 머리를 흔들며 신전의 빈 공간을 휘돈다. 삼각대가 거치적거리면 닥치는 대로 넘어뜨린다. 여사제는 포이보스의 분노를 참아내며 이글이글 타는 불속에서 끓어오른다. 배를 몰고 가축을 이끌고, 불꽃을 여사제에게 던지는 것은 아폴론 혼자가 아니다. 여사제 또한 고삐를 잡아야 한다. 아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미래를 드러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이 한데 모이고 모든 세기가 여사제의 가슴을 채워 고통을 가한다.
끊이지 않는 사건의 고리가 드러나고 모든 미래가 빛을 향해 발버둥치고 운명과 운명이 말해지기를 다툰다. 세상의 창조와 파멸, 대양의 둘레와 모래의 수효가 여사제 앞에 펼쳐진다. 쿠마이의 시빌이 에보이아의 동굴에서 자신의 영감이 뭇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도도한 손을 놀려 운명의 거대한 더미에서 로마의 운명을 집었듯이 포이보스에게 사로잡힌 페모노이 또한 한참을 뒤적인 뒤에야 위대한 이들의 이름을 숨겨진 아피우스의 이름을 찾아냈다.
카스탈리아의 땅은 숨은 신에게 물으려 이곳을 찾은 아피우스를, 페모노이에게 아피우스의 이름을 찾자, 맨 먼저 거품을 문 입술 사이로 광기에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페모노이의 숨을 헐떡이며 신음을 내뱉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질렀다. 무시무시한 비명소리가 널따란 신탁실을 채웠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페모노이에게 도렷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마인이여, 그대는 호된 시련을 겪지 않을 것이며, 무시무시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것이다. 에보이의 해안의 드넓은 분지에서 그대만이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때 아폴론이 페모노이의 목구멍을 막고 말을 끊었다
‘비의적 또는 제의적 신들림’은 예외 없이 디오니소스 신과 연관되었다. 이런 유형의 신들림에서는 제의에 참가함으로서 집단의 의식상태가 바뀌면 참가자 개개인이 디오니소스에게 신들림을 입는다. ‘비의적 신들림’은 미래에 대한 지식을 약속하는 ‘예언적 신들림’과 같은 뚜렷한 유익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참가자들은 원초적 본성과 나머지 참가자 그리고 디오니소스와 묶음으로서 일상을 초월하게 해 준다.
그리스 사회, 특히 아테네에서 가장 억눌리고 고통 받는 집단인 하층계급과 여성에게 디오니소스가 가장 큰 인기를 누렸음은 주목할 만하다. 자발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의적 신들림’은 억압받는 사회집단에 나타났으며 특히 사회적 긴장과 갈등, 불확실성의 시기에 늘어나는 듯하다. 그래서 일부 고전 학자들은 ‘비의적 신들림’ 과정에서 비합리적 요소를 중시하는 것이 고전주의적 이상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고전 시대의 이상화된 이미지에 걸맞도록 고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재구축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시적 광기’는, 즉 시인이 시를 짓거나 읊을 때 무사가 불어 넣는 영감은 서사시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 무사에게 올리던 전통적인 기도로 정형화 된다. 플라톤은 <이온>에서 이 같은 시적 광기를 설명한다.
“시인은 가볍고 날개 달린 거룩한 존재이며 영감을 얻어 자신의 감각을 벗어나 자신의 마음에 몸속에 있지 않을 때까지는 시를 지을 수 없으며, 이러한 신들림을 유지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를 짓고 신탁을 읊을 수밖에 없소. 인간의 위업에 대해 수많은 말을 짓고 말하는 것은 – 그대가 호메로스에 대해 그러하듯- 기예가 아니요 신성한 은총으로 인한 것일진대, 각 사람은 무사께서 자신에게 주신 영감만큼만 지을 수 있소. 누구나 뒤티람보스(주신 찬가)를, 누구는 찬미가를, 누구는 춤곡을, 누구는 서사시를 비롯한 약강시(iambic verse)를 짓되 자기 분야가 아닌 것은 서툰 것이오, 이는 시를 읊는 것이 아니요 신성한 영감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오.”
사라의 광기, 즉 에로스에 의한 신들림은 <파이드로스>의 테마이다. <파이드로스>에서는 사랑의 광기를 가장 고귀한 형태의 광기로 칭송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모두 네 번째 광기에 대한 것이었네. 지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참된 아름다움을 상기하면 자신에게 날개가 돋는 듯 느끼며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기를 갈망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마치 새처럼 위를 바라보며 아래에 있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네.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 모든 신들림 중에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고, 가장 좋은 것에서 비롯하며, 이 광기에 사로잡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erastes)’라고 불린다네.
신들림에서 오는 은혜로운 광기의 예에서 보듯 5세기 아테네인들은 신에게 사로잡혀 생기는 광기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성인이 된 디오니소스는 포도주 만드는 법을 터득해 동료들과 항상 만취해서 즐겼다. 그로 하여금 광음(狂飮)으로 만취케 한 것은 헤라가 디오니소스를 미치게 만들었기에 가속화된 것이다. 후자의 ‘광(狂)’과 전자의 ‘음(飮)’이 합해져 ‘광음(狂飮)’, 또는 ‘통음(痛飮)’이 되어 결국 ‘난무(亂舞)’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유랑하였는데,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따라다녔다.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을 ‘마이나데스(Mainades)’라고 불리는데, 그들 중에는 반인반양(半人半羊)으로 나귀를 탄 늙은 ‘실레노스(Silenos)’, 그를 길러준 요정들, 반인반마인 ‘사튀로스(Satyros)’, 왕성한 생식력의 소유자인 ‘프리아포스(Priapos)’ 등이 있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무아지경에 빠진다.
디오니소스는 표범을 타고 손에는 튀르소스(Thyrsos)라는 홀(笏, 송악으로 장식, 끝에는 솔방울이 달려있다)을 들고 있었다. 가난하고 억압당한 사람들의 디오니소스 숭배 열기는 대단했다. 황소를 신으로 여기며 잡아먹던 의식이 디오니소스 숭배의 첫 의식으로 도입되었다. 들판에 황소를 풀어놓고 소리 지르면서 쫓아다니다가 잡아서 고기를 날로 먹는다. 이러한 비합리적 행동을 통해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은 도취감과 열광을 만끽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신과 동화되는 과정으로 여겼다.
디오니소스와 그 무리가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Trakya)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왕인 리쿠루고스(Lykourgos)는 디오니소스를 잡아 가두려 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나라를 추운 이국인의 땅이며 북풍신 보레아스(Boreas)의 고향으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는 여러 신을 숭배하였고 일부는 잔인하고 음란한 제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와 연관성을 갖는 신화에서는 흔히 거세와 같은 야만성 에피소드가 끼여 있다. 특히 트라키아 왕 리쿠르고스와 디오메데스(Diomedes)는 사람을 죽여 그 인육을 암말에게 먹이는 자로, 헤라클레스의 일곱 번째 과업은 그 암말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토록 잔혹하면서 ‘마이나데스’들의 난폭성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였다.
잔혹성을 지닌 기원전 7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디오니소스 숭배를 난폭하게 금지시키고 숭배자를 모두 국외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고 디오니소스가 주관하는 포도주가 사람을 만취하여 정신을 혹하게 하는 불결한 액체라 하여 자신의 영토 내의 모든 포도나무를 잘라 버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결국 이러한 불경 행위는 디오니소스의 노여움을 사서 극심한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자 디오니소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왕은 마이나데스들 중에서 여자들을 가두었으나, 그녀들은 곧 풀려나고 오히려 왕이 미쳤다. 포도나무를 자른다고 도끼를 휘둘렀는데, 잘린 것은 그의 다리와 아들의 손발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황폐해지고 불모의 땅이 되었다. 신탁을 물으니 디오니소스의 분노를 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왕이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왕은 ‘마이나데스’들에게 잡혀 죽었다.
디오니소스 일행은 트라키아를 떠나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이동하였다. 선장이 디오니소스를 노예로 팔려고 하자, 디오니소스는 선원들을 모두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원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돌고래로 변했다. 디오니소스가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에 도착했을 때, 자연의 여신이며 신들의 어머니인 퀴벨레(Kybele)가 디오니소스의 광증을 고쳐주고 그녀의 신비종교에 입문시켰다. 이때부터 디오니소스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는 내친 김에 인도까지 여행하였다. 가는 곳마다 ‘자유로운 아버지’이며 ‘해방자’인 디오니소스의 능력에 환호하였다. 그는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술과 노래와 춤에 취해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디오니소스의 위력은 디오니소스로 하여금 그리스로 귀환하여 어머니 세멜레의 고향 테바이로 가게 한다. 그러자 테바이 왕 펜테우스(Pentheus)는 이들의 의식을 금지시켰다. 그는 키타이론(Kithairon) 산에서 벌어지는 소란스러운 디오니소스 제전을 몰래 지켜보다가, 그를 사자로 오해한 그의 어머니 아가우에(Agaue)와 다른 여신도들에게 잡혀서 찢겨죽는다. 디오니소스 열기는 점점 더 퍼져나가 통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르고스(Argos)에서는 왕의 딸들이 스스로 암소라고 생각하고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자신들의 아이들마저 잡아먹어 버린다. 그리스 전역이 디오니소스의 위력을 받아들인다. 신들이나 받을 수 있는 숭배였다.
아래 그림은 폼페이에 있는 베티이의 저택에서 발굴된 벽화이다. 역시 펜테우스 왕의 최후가 그림의 주제이다. 화면의 전면 중앙 하단에 펜테우스가 자리 잡고, 디오니소스 여사제들이 주위에 늘어서서 공격을 가하고 있다. 채색이나 옷주름 처리 그리고 표정들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구성이 꽤 탄탄하고 짜임새가 있다.
특히 여러 가해자들이 중앙의 목표물을 향해서 일제히 내향적 자세와 시선을 처리하고 있는 반면, 독신의 혐의로 처형의 운명을 맞은 펜테우스는 사지를 바깥으로 뿌리며 외향적 동세로 맞받는다. 이 두 가지 움직임의 긴장과 충돌이 우리를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절정으로 이끈다.
그리스인들은 항상 와인을 물과 희석시켜 마셨다. 당시에는 와인을 물에 섞어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디오니소스만이 순수한 와인을 마실 수 있었으며 미약한 인간은 와인의 강렬함을 소화해 낼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와인에 취해 미치거나 난폭해지는 인간의 약한 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다. 기원전 4세기의 시인 유볼로스는 디오니소스에 대해 노래하면서 “나는 절제를 위해 세 개의 잔을 채우네. 첫 번째 잔은 건강을 위해, 두 번째 잔은 사랑과 쾌락을 위해, 세 번째 잔은 숙면을 위해, 네 번째 잔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만의 것이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고, 물건을 부수고, 절망에 빠지고, 열 번째 이르려서는 미쳐서 가구를 내던지게 하네.”라고 읊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편에서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빌려 ‘신에게서 받은 것인 한’에서 광기를 옹호한다.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선물로 주어지는 광기’와 ‘질병’적인 광기’를 구분하면서, 온전한 인간들의 정신으로부터 생기는 것보다 신적인 광기가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사실은 좋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것들은 광기를 통해서, 단 그것이 신적인 선물로 주어질 때” 나타난다고 말한다. 또한 “광기가 들어서는 사적인 일에서나 공적인 일에서나 그리스에 정말 많은 좋은 일들을 했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서는 거의, 아니 전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신적인 선물로 주어지는 광기가 찬양받는 이유는 광기가 신적 진리와 친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계시를 통해서 주어지는 진리는 인간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없으며, 오로지 외부 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신에게로부터 오는 광기를 4종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 광기는 아폴론에게서 오는 신적인 예언술 이다. 소크라테스는 “제 정신인 사람들의 탐구”인 점술과 광기에서 비롯되는 예언술을 비교한다. 소크라테스는 양자를 비교하면서 어원적 분석을 시도하는데, 점술은 “생각을 통하여 인간의 의견에 분별과 식견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는 반면 예언술은 “신적인 섭리에 의해 생길 때는 광기가 아름답다”는 어원을 내포한다.
또한 신들린 예언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일을 이야기해 주어서 사람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점술보다는 신적인 광기에 의해 발현되는 예언술이 이름이나 효능의 측면 모두에서 더 완전하다고 여긴다.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로부터 유래한 종교의식에서 나타나는 광기이다. 종교 의식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광기가 생겨나고, 그 광기를 이어받은 예언자가 사람들에게 질병과 고난에 대한 구제책을 찾아 준다. 종교의식의 한 과정인 정화의식이나 입교의식에서 나타나는 광기가 옳게 들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주어 사람들을 보호해준다.
세 번째 광기는 뮤즈들에게서 오는 시적 광기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시적 광기는 여린 영혼에게 서정시를 향한 바커스적 열광을 제공하고 옛 시인들의 작품들을 찬미하게 만든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제 정신으로 시를 쓴 사람들은 결국 광기를 가지고 시를 쓴 자들의 시에 의해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광기 없이도 기술로써 어엿한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고서 시의 문에 다다르는 자는,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뿐더러 그의 시, 즉 제정신인 자의 시는 광기가 든 사람들의 시에 의해 무색해진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광기가 에로스에 뿌리를 둔 ‘사랑의 광기’이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인간들의 것을 신들에게, 그리고 신들의 것을 인간들에게 해석해주고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광기에 맞닿아 있다. 또한 플라톤은 에로스가 지니는 특징으로 “최대의 행운으로서 그와 같은 광기가 신에게서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예언술, 종교 의식에서 나타나는 정화, 시적 영감, 그리고 사랑이 각각 광기로 여겨지는가? 첫째, 플라톤 이 제시하는 4가지 광기는 모두 나의 의지로부터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광기를 가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보기에 신적인 예언, 종교적 정화, 예술적 영감, 사랑은 나의 외부로부터 떠밀려 들어오는 것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각각의 요소는 오직 목적한 대상만을 바라보는 열정, 그리고 때때로 드러나는 광포함을 가진다는 점에서 광기와 공통점이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4가지 광기는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의 은혜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종류의 광기가 아니라, 신을 통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광기이다. 플라톤에게 신적인 광기는 예언술, 디오니소스적 광기, 시적 광기, 그리고 에로스이며 이 네 가지 광기는 질병적인 광기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