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如酒
임재철 칼럼니스트
겨울을 부르는 늦가을,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진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에는 반쯤 쓸쓸하고 반쯤 고요하다. 가슴과 머리속이 교활하게 그렇다. 한 해가 규칙처럼 또 저물어 간다. 썰렁하게 서두르는 가을빛을 옅게 바라보며 주위를 보니 양지바른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며 세월을 즐기는 것 같고, 음지의 없는 사람은 삶을 위해 버티는 것 같다. 술 마시며 어울리던 친구들도 일찍이 중심에서 멀어진 이 많고, 어떤 이는 지금도 왔다 갔다 하고, 어떤 이는 가까이에 있다.
그러는 사이 여전히 백수 내지는 졸고 칼럼리스트 내지는 자유인으로 근 1년을 놀아 보니… 조금은 두려움도 생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삼수를 가든 갑산을 가든 이젠 누가 뭐라 하겠나 싶기도 하지만, 편하지 않고 집에 홀로 앉아 가끔 맥주 캔을 따거나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면 너무 조용해서 더 고독하다. 그러니까 평범한 듯 하지만 필자는 딱히 취(醉)하는 일 외에 그저 바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구글 포토에서 ‘10년 전…오늘’이라고 뜬다. 이는 기억의 매개가 되기도 하지만, 한 해가 석양에 있고 하루하루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고달프고 쓸쓸한데 어찌 10년의 세월은 지난 밤의 술자리처럼 이토록 확연한가. 세월이 큰 걸음으로 질주하기 시작하면 이미 늙은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필자도 한 때는 나날이 술 마시는 일이 업무 중 일부라서 접대 술로 폭탄주 문화에 익숙했던 지라 술집에서 늙느라 그럭저럭 세월을 놓쳤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마다 아쉬움이 크지만, 때로는 얼큰한 취향(醉鄕)의 경지가 관성처럼 절실한 것이 인간의 삶이다. 필자 또한 변방의 술집에서 허름하게 취하니 뚝 떨어진 기온에 갑자기 중국 윈난(雲南) 다리(大理)주변의 늦가을색이 궁금해진다. 그러고 보니 구이저우(贵州)의 가을 소리도 궁금해진다. 필자에게는 ‘서울의 가을’보다 중국의 가을이 더 시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아마 주당의 세월 탓이리라. 요즘은 예전처럼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즐겨 마시는 술이 그곳에 있으니 어쩌겠는가.
취향을 채우는 데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이른바 인천공항을 떠나 좋은 명소로 여행을 가는 술꾼 친구들이 많다. 지저분한 뒷골목으로 차라리 마음 편했던 ‘피마(避馬)골’에서 마시던 애주가들이 먼 길을 가버린 후 더욱 그런 것 같다. 가령 서늘하고 축축한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 바찌거리 맛집에서 누군가와 주절이 주절이 들이키는 친구도 있고, 낭만의 도시 체코 프라하에서 화이트와인을 은은하게 음미하는 선배도 있고, 가까운 일본의 사케를 찾아 들락거리는 사람도 있고, 홍콩이나 싱가포르 술집 불빛 아래서 술병을 세며 지갑을 거덜내는 후배도 있고, 파리 센 강 호텔 창가에 앉아서 이슬을 맞으며 마시는 친구가 탄생하고 있다.
그러면서 “혼자 떠나와서 미안하구려”라고 톡을 보내며 “친구, 한국의 11월을 견디지 않으려고 비행기를 탔네”, “국태민안을 위해 한잔(一杯)하고 있네.” 아, 그토록 깊은 뜻이 있었구나! 식자우환(識字憂患)인지 人生如酒인지 역여행인지… 암튼 다동나그네는 그들의 보폭에 발 맞추지 못해 오랫동안 멍 때리는 시간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간직한 세상의 상처와 열망들은 제 무게를 덜었을까? 필자로서는 그들이 그 좋은 술자리에서 저열한 세상 따위의 이야기 같은 건 삭제하고 세월을 즐기며 평화롭게 술꾼의 축복이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언론인 한 선배의 지론처럼 “술은 미디어다.”임이 분명하다. 즉,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통찰과 정보와 소통을 담은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거다. 이를테면 오래된 와인과 같은 친구(老友)들이 돌아와 변함없이 술집과 술집 사이 아니면 주막과 카페 사이에서 가슴을 허물고 그렇게 저렇게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미디어’로 오늘을 살아가면 좋겠다.
바람이 차고 낙엽이 흩날리고 쓸쓸해지기에 참 좋은 이때, 좋은 사람들과 낮술도 먹으러 다니고, 그저 묵묵히 하루를 잘 살고 저녁 술시에는 자, 한잔 들게나! 하면서 뚜벅뚜벅 가는 길을 가며,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겪는 힘든 삶의 흔적도 옅어지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저러나 다음이 없는 인생길에서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다. 급변하는 세상, 실존의 고통 이전에 사람마다 살아가는 처지가 다 다르고 세상도 다 다르게 보이는 거지만, 우리가 더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내 삶 자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시대를 헤쳐 오며 우리나라 최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작가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이유 중 하나다. “글쓰기보다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는 한강 선생의 죽비가 벼락과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