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할머니를 생각하며 마시는 술 한 잔

박정근 칼럼

 

텃밭에서 할머니를 생각하며 마시는 술 한 잔

 

박정근 (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박정근 교수

필자는 지난 팔월에 부안으로 귀농했다. 귀농을 한 집에는 팔십 평 정도의 텃밭이 있다. 유난히 더웠던 구월부터 일찍 일어나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한낮에는 찌는 듯 한 더위로 농사일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새벽 일찍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기운 후에 일을 해야 했다. 텃밭을 보면 옛날 고향 본가 앞에 있었던 텃밭 정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이슬을 맞으며 일하시던 모습이 색이 바랜 흑백사진처럼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필자는 장손이라서 조부모 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서 생활하는 동안 모성애에 대한 결핍증에 시달렸다. 게다가 초등학교를 일 년 조기 입학하는 바람에 외로움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지으면 할머니께서 나를 보듬어주시고 슬픔을 달래주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유달리 따르게 되었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필자에게 맛있는 것을 챙겨주셨다. 할머니는 텃밭에 토마토, 가지, 오이, 호박 등 온갖 채소를 재배했다. 그녀는 아침 일찍 텃밭에 나가 일하시고 잘 익은 과일과 채소를 따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아침상에 싱싱한 채소를 썰어오거나 반찬으로 만들어 내놓았다.

싱싱한 채소로 만든 반찬과 얼큰한 국물이 함께 올라온 밥상에는 항상 할아버지를 위한 반주가 준비되었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는 혈액순환을 위해 반주를 한잔씩 드시곤 했다. 할아버지를 위한 조찬 상에는 언제나 장손인 필자가 함께 참여했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일하시는 동안 할아버지는 언제나 싸리 빗자루를 들고 넓은 마당을 정갈하게 청소하셨다. 마당 청소는 할아버지에게 딱 알맞은 아침운동이었다.

마당을 청소하시고 먹는 조찬은 조부로 하여금 왕성한 식욕을 일으켰으리라. 할아버지께서는 식사를 천천히 하면서 오래 씹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식욕을 채우려고 허겁지겁 먹는 일반 농부들하고는 달랐다. 조부는 소위 창이나 시조를 읊으셨던 한량으로서 식사의 매너를 지키셨다. 그는 절반 정도 식사를 하신 후 대병 소주병에서 마치 제사상에서 하듯이 소주 한잔을 따르시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식사를 마치신 후 다시 소주 한 잔을 더 드시는 습관을 제의의 절차처럼 매일 거르지 않았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따온 오이나 고추는 조부에게 깔끔한 안주가 되었다, 물론 필자도 할아버지의 식성을 받아서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 시골에 내려와 텃밭을 가꾸면서 조부모의 식성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특히 할머니는 필자가 좋아하는 호박떡을 생일날에 맞추어 만들어주셨다. 호박떡은 익산으로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생일날만 돌아오면 부안에서 호박떡을 만들어서 익산으로 보내주실 정도로 장손에 대한 할머니의 정성은 대단했다. 그리고 잘 익은 토마토를 썰어서 맛있게 설탕을 쳐서 내놓으셨다. 이런 음식들은 단순한 영양식을 넘어서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상징물이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50여년이 흘렀다. 아이러닉하게 할머니의 나이가 된 필자가 귀농하여 동일하게 텃밭을 가꾸고 있다. 아침 일찍 텃밭에서 삽질을 하면서 허리가 뻐근해지면 꽤 넓은 텃밭의 일을 도맡으셨던 할머니의 노고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는 허리가 아프셔서 삽보다 호미로 텃밭을 가꾸셨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넓은 밭을 일구시면서 힘든 농사일을 하셨을까. 할머니의 노고를 아픈 허리를 펴면서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마치 술 한 잔으로 옛날 할머니의 허리를 지금이라도 주물러드리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소주를 마시면서〈텃밭〉이란 시를 지어 저승에 계신 할머니를 향해 조용히 읊조린다. 텃밭에서 딴 상추를 소쿠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오시는 할머니가 보인다. 그래, 할머니는 텃밭에서 사랑을 기르고 자손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신 거야. 그걸 칠순 나이에 들어서야 깨닫다니 다행이야.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할머니를 텃밭을 가꾸면서 떠올리다니 너무 늦었어. 필자는 자책하는 마음으로 소주를 한 잔 더 부어 마신다.

여명이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

눈곱 낀 눈을 비비며

이슬을 잔뜩 머금은 텃밭에 나가면

무거운 흙덩이를 뚫고 나와

작은 손 내미는 파란 새싹들

 

비바람이 몰아치는 잔인한 세상에서

거친 창으로 약한 허리를 찌르는

잡초들을 노려본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질투와 폭력을 이겨내고

척박한 땅에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두려움에 떨었던가.

 

잠이 없던 할머니는 말씀하셨지

새벽마다 텃밭에서 싱싱한 상추를 따오시며

이거로 쌈 싸서 먹으면 기운이 펄펄 날 거야

마치 보약이나 되는 양 의기양양하셨지

칠순이 넘어서야 할머니 사랑이 느껴져

보고파 눈물을 짓는다.

 

텃밭을 둘러보며 속삭인다

홍갓은 누나 네랑 나누고

시금치는 딸네 반찬 만들어줘야지

농사일도 해본 적이 없는 아내랑

나눔의 행복을 전하리라

 

이것이 바로 할머니 사랑이었겠지

어느 보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족 사랑이겠지

텃밭에서 땀을 흠뻑 흘린 힘든 노동이지만

어떤 것도 이것보다 귀한 것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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