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故知新 박록담의 복원 전통주 스토리텔링(23)
섣달에 빚어 납일 날 마시는 술, 가치가 매우 높은 납주(臘酒)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율시(律詩)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양곡선생집(陽谷先生集)>의 ‘제야(除夕)’라는 시(詩)에,
석양빛이 기울어 깊은 산골에 이르니, 양 귀밑털에 흰 눈과 서리만 더해지네.
세잔의 납주(臘酒)에 혼미하게 취하고서 황계가 백일가를 부르는 것을 듣네.
강과 산을 방문할 것을 깊게 생각하다가 높은 베개를 베고 자니 한 해가 바뀌었네.
오늘밤에는 가장 좋은 집에서 도소주를 마시니 이미 임자년(1552) 사람이 되었네.
남쪽으로 와서 14번 봄이 돌아옴을 보며 손수 매화를 심었는데, 모두 꽃을 피었네.
술잔을 들어 감히 새해 축하를 하며 일문이 부고하고 또한 무재하기를 기원하네.
…(후략)…
라고 하였으며, 같은 시대 권벽(權擘, 1520~1593)의 <습재집(習齋集)>의 ‘제야(除夜)’라는 시에서도,
심하다! 나의 노쇠함이여, 세밑의 하늘은 어두워지네.
산초 나물과 납주(臘酒)를 마시며 폭죽으로 밤잠을 거부하네.
오래 앉아 자주 촛불을 옮기며 많이 읊조리나 시가 되지 않네.
잠시나마 이 밤을 아쉬워하지만 내일이면 또 새해가 되네.
라고 하여, ‘납주(臘酒)’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으며, 이 두 편의 시를 통해서 ‘납주’가 자전풀이 그대로 ‘섣달에 빚어 나눠 마시는 술’ 또는 ‘연말연시에 마시는 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납주’는 1823년에 간행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와 1830년에 간행된 <농정회요(農政會要)> 등 한문체 인쇄본에 2차례 등장하는데, 여느 술에 비해 가치가 매우 높은 술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우선, 특이하게 ‘쉰밥’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주품이나 주방문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쉰밥’은 먹다 남은 밥을 잘못 간수하여 부패가 진행된 밥을 가리키며, 섣달에 다가오는 명절인 ‘설’ 음식 장만을 많이 하다 보면 잔반(殘飯)이 많게 되기 십상인데, 버리기는 아깝고 먹을 수는 없는 잔반을 사용하여 빚는 술인 셈이다.
따라서 ‘납주’는 비교적 규모가 큰 사대부 집안이나 부잣집에서 잔치용 음식 장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만큼, 음식 장만을 하는 일가친척들이나 하인들, 그리고 집에 찾아드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예삿술을 준비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른바 설날 사용할 술이 익기까지 대용으로 쓸 술인 것이다.
주방문을 보면 알 수 있듯, 쉰밥 2말과 10배에 해당하는 찹쌀 2석으로 고두밥을 지어, 누룩 40근과 물 200근을 합하고 고루 버무려 술독에 담아 안치는 단양주법(單釀酒法)의 술이라는 사실과 함께, 12월 중에 술이 익으면 용수를 박아 청주(淸酒)를 채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12월에 쉰밥 2말과 찹쌀 2석을 사용하여 술을 빚어야 할 만큼 한꺼번에 많은 양의 청주가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머지않아 설날이고, 설날은 그 어떤 술보다 좋은 재료로 빚고 정성을 다한 중양주(重釀酒)가 제주(祭酒)와 빈객(賓客) 접대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원십육지>와 <농정회요>의 ‘납주’는 주방문이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농정회요>의 주방문은 <임원십육지>의 기록을 그대로 베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른 양주 관련 문헌이나 어떠한 기록에서도 ‘납주’에 대한 주품명이나 주방문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두 문헌의 ‘납주’ 주방문에서 술 빚는 법에 따른 특이점이나 주의사항은 별반 없었다.
굳이 언급하자면 ‘납주’는 멥쌀로 끓여서 만든 밥으로 먹다 남아 버릴 수밖에 없는 쉰밥과 찐밥인 찹쌀고두밥을 섞어 빚는 술인 만큼, 이제까지 발굴 조사된 전통주 가운데 유일한 주방문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와 유사한 술로 <주식방(酒食方, 高大閨壼要覽)>에 수록된 ‘노산춘(魯山春)’을 참고하여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납주’는 조선시대의 양조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 양조기술과 견주어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술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임원십육지>의 ‘납주’ 주방문을 그대로 옮기면, “찹쌀 2석, 물 200근, 누룩 40근, 쉰밥 2말 또는 멥쌀 2말로 밥을 짓고 발효시켜 그 맛이 짙고 매워지면 납월 중에 빚어 익을 때 성근 대바구니 2개에 번갈아 가며 술병을 두고 끓는 물에 넣어 끓는 물과 같이 끓으면 꺼낸다.”고 하였는데, <농정회요>에서도 <임원십육지>의 주방문과 동일한 ‘납주’ 주방문을 싣고 있다.
문제는 ‘납주’ 주방문 말미에 “채주한 청주를 병에 담고, 소쿠리에 담은 후, 끓는 물속에 넣어 살균하는데, 병의 술이 물과 같이 끓으면 건져서 식힌다.”고 하는 내용으로, 이는 이미 1800년대 초기에 발효주의 장기 저장과 유통을 위한 살균법(殺菌法)인 ‘화입법(火入法)’이 사용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나라의 양주(釀酒) 역사와 기술, 음주문화 관련 최초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1450년대의 <산가요록(山家要錄)>을 비롯한 70여 권의 문헌 가운데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화입법’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190년 전에 개발된 양조기술이라는 사실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된다.
1914년 ‘주세법’의 도입 이후, 주류의 산업화를 추구하면서 일본의 ‘코지’를 사용한 양조기술과 ‘화입법’의 도입으로 우리나라의 양주산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고 자부하는 일부 전문가와 양주 관련 부처의 담당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하다.
전통 양주기술과 문화는 ‘구습’이자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으로까지 매도했던 그들에게, 190년 전의 ‘납주’ 주방문을 꼭 확인시켜 주고 싶다.
<임원십육지>의 ‘납주’에 도입된 살균방법으로서 ‘화입법’은 말 그대로 현대에 와서도 적용되고 있는 ‘고도의 양주기술’이다.
필자는 “굳이 왜 ‘납주’에 ‘화입법’이 도입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어, ‘납주’를 <임원십육지>의 주방문 그대로 빚어 본 결과, 맛이나 향기에 있어서도 결코 여느 술과 견주어 뒤떨어지지 않는 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대 양주에서 채용하고 있는 ‘납주’의 ‘화입법’ 도입은 ‘납주’에서 얻어지는 청주의 양이 매우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납주’는 겨울철에 빚는 술이므로 굳이 장기 저장을 위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단양주법의 기술로 장기 저장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케 된다.
70여 권에 이르는 고서의 주방문의 채록과 1천여 가지가 넘는 주품마다의 주방문 번역 작업을 해오면서, ‘납주’는 그야말로 “심봤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간의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쾌재를 가져다주었다.
술 빚는 법-
◈ 납주 <농정회요(農政會要)>
술 재료:찹쌀 2석, 흰누룩 40근, 쉰밥 2말(쌀 2말), 물 200근
술 빚는 법:① 찹쌀 2석(20말)을 백세 하여 물에 담가 불렸다가, 다시 씻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말갛게 헹궈 건져서 물기를 뺀다. ② 불린 찹쌀을 시루에 안쳐 고두밥을 짓고, 고두밥이 익었으면 고루 펼쳐서 차게 식기를 기다린다. ③ 별도로 쉰밥 2말을 물에 담가 불려서 쉰 냄새를 빼고, 다시 씻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말갛게 헹궈 건져서 물기를 뺀다. ④ 찹쌀 고두밥과 쉰밥, 흰누룩 40되, 물 200근을 한데 합하고, 고루 버무려 술밑을 빚는다. ⑤ 술밑을 술독에 담아 안친 후, 예의 방법대로 하여 발효시켜, 술이 익으면 용수를 박아 채주한다. ⑥ 청주를 떠내고 남은 찌꺼기는 끓여서 차게 식힌 물 1말을 붓고 체로 걸러, 탁주를 만든 후 맑아지면 사용한다. ⑦ 떠낸 청주를 담은 술병을 광주리에 담아 끓는 물솥에 담가두었다가, 술이 끓으면 꺼내어 차게 식힌다.
* 주방문에 “쉰밥 또는 쌀 2말로 밥을 짓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쉰밥이 없으면 쌀로 밥을 지어 빚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른 기록에는 “섣달에 빚어 납일 날 마시는 술”이라 하여 ‘납주’라는 술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원문> 臘酒 : 用糯米二石水與酵二百斤足秤白麯四十斤足秤酸飯二斗或用米二斗起酵其味醲而辣正臘中造煮時大眼藍二箇輪置酒甁在湯肉與湯齊滾取出.
◈ 납주방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술 재료:찹쌀 2석, 누룩 40근, 쉰밥 2말(쌀 1말로 지은 밥), 물 200근
술 빚는 법:① 찹쌀 2석을 백세 하여 하루 동안 물에 담가 불린 뒤, 다시 씻어 건져서 물기를 뺀 후 시루에 안쳐 고두밥을 짓는다. ② 고두밥이 익었으면 퍼내고, 고루 펼쳐서 차게 식기를 기다린다. ③ 쉰밥 2말을 준비한다(멥쌀 1말을 백세 하여 물에 담가 불렸다가, 다시 씻어 건져서 물기를 뺀 후 솥에 끓여서 밥을 짓고) 이내 차게 식기를 기다린다). ④ 찹쌀 고두밥과 식은 밥 또는 멥쌀밥, 누룩 40근, 물 200근을 한데 합하고 고루 버무려 술밑을 빚는다. ⑤ 술독에 술밑을 담아 안친 후 예의 방법대로 하여 발효시키되, 12월 중에 술이 익으면 용수를 박아 청주를 채주한다. ⑥ 채주한 청주를 병에 담고 소쿠리에 담은 후 끓는 물속에 넣어 살균하는데, 병의 술이 물과 같이 끓으면 건져서 (찬물에 담가 차게) 식힌다. ⑦ 청주를 떠내고 남은 찌꺼기는 탁주로 거른다.(끓여서 차게 식힌 물 1말을 붓고 체로 걸러 탁주를 만든다).
<원문> 臘酒方 : 用糯米二石水與醇二百斤(足)秤白麴四十斤足秤酸飯二斗或用米二斗起酵其味醲而辣正臘中造煮時大眼藍二箇輪置酒甁在湯內與湯齊滾取出. <遵生八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