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조 예술> 정회철 대표
잘 나가던 憲法학자가 전통주 빚는 匠人 되다
홍천 내촌면 산골에서 단호박 넣은 전통주 빚어
춘분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꽃샘추위가 들락거린다.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추위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세상은 온통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바둑 대결에 관심이 꽂혀 있다. 바둑계로선 못처럼 전 세계에 바둑이야기를 전파할 수 있어서 좋겠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기계와 대결에서 패하는 장면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희로애락을 느끼며 친한 벗과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지만, 지능이 아무리 발달한 기계라도 아직은 그 맛과 멋을 느끼지는 못하리라. 그렇지만 언젠가 불쑥 잔을 내밀고 한잔 하자고 할까봐 지레 겁도 난다.
‘삶과 술’ 신문을 발행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가 술도가를 취재할 때다. 명성이 높고 이름난 술도가를 찾는 날은 가슴이 설렌다. 마치 맞선을 보러 나가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번 술도가 취재 길은 그렇지 못했다. 왜냐 하면 취재를 약속한 술도가의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이런 방이 붙어 있지 않은가.
저희 ‘예술’은 현재 직접 누룩을 생산하여 술을 빚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 누룩에 맞춘 술빚기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해 술의 품질이 일정하지 못합니다. 저희 ‘예술’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앞으로 6개월간(3월~8월) 생산 및 판매를 일시 중단하고자 합니다. 저희 ‘예술’의 제품을 사랑해주시는 고객 여러분께 죄송스런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6개월 후에 더 좋은 제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 정 회 철
한 마디로 6개월 동안 술 빚기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6개월씩이나 술을 빚지 않는다는 말인가.
전통주조 ‘예술’은 홍천군에서도 오지인 내촌면 물걸리 백암산(해발 1,097m) 자락에 터를 잡고 있었다. 44번 국도 철정교차로에서 내촌면 소재지까지 20여 ㎞를 달려 들어가도 술도가가 있을 만한 곳은 눈에 띠지 않는다.
분명 내비게이션은 계속 직진 표시로 길 안내를 하곤 있지만 길을 잘못 들었다는 불안감마저 든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다 보니 마치 정감록(鄭鑑錄)의 예언대로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십승지 같은 마을이 나온다. 여긴가 싶었는데 길 안내자인 내비게이션은 더 가란다.
정문에서 맞닥뜨린 ‘불취무귀(不醉無歸)’
어렵사리 ‘예술’이란 간판을 찾았다. 그리고 또 계곡을 따라 한참을 들어갔다. 전통주조 예술 입구에서 맞닥뜨린 것은 ‘불취무귀’라는 글귀가 쓰인 큼지막한 바위였다. 한글로만 쓰여 있어 얼른 무슨 뜻인가 했는데 사실은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조가 즐겨 쓰던 표현이라고 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신하들에게 술을 청하며 했던 말인데 술을 통해 정적들에게 화해를 청하려 했던 것이란다. 요즘의 정치가들도 한 번 새겨들었으면 좋을 말이다.
듣기로 ‘예술’의 정회철(鄭會澈, 55세) 대표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한 변호사, 헌법학자다. 선입견으로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신사가 아닐까 생각이었는데 막상 수인사를 나누고 보니 생각과는 영~ 딴 판이었다.
꽁지머리에 수염까지 길렀다. 승복 같은 잿빛의 개량 한복을 입은 스타일인데 얼굴가득 환한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른다. 보아하니 그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교수나 변호사 보다 술 빚는 일이 더 좋습니까.
“그럼은요.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동기(서울 대)들도 그렇고, 사시(40회) 출신 친구들도 나를 무척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인이니까요”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변호사나 교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씁니까. 전업하신 무슨 특별한 동기가 있을 법 한데요….
“첫째는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제 전공이 헌법이거든요 헌법 수험서를 1년에 10권 정도 집필하고 고시학원에 출강해서 강의도 하다 보니 심한 스트레스가 쌓여서 건강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책을 5분만 보아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라고요. 게다가 로스쿨이 생기면서 법학전문대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니까 건강이 더 나빠졌습니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지요.”
-그렇다고 바로 술도가를 차리신 것은 아니겠죠.
“물론이죠. 머리도 식힐 겸 집 사람하고 여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평소 관심을 두었던 술도가들도 찾아보곤 했습니다. 술도가에 가면 술익는 소리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생명이 숨 쉬는 소리니까요.”
처음으로 빚어 본 술이 이웃으로부터 칭찬 받아
정 대표는 인터넷을 통해 술 빚는 법을 배워 처음으로 술을 빚어 보았다고 했다. 그 술을 이웃들에게 권해 보니 뜻 밖에 맛있는 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처음으로 낚시를 갔다가 월척을 낚아 낚시꾼이 된 것 같은 이유다.
정 대표는 아마 그 때 ‘맛없는 술’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면 지금의 술도가의 주인은 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또한 인연이나 팔자 탓이겠지만….
이때가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절이라고 정 대표는 회고한다.
정 교수는 술을 빚어 오고 학생들은 안주를 준비해서 자주 술 파티를 했다. 나중에는 정기 회식처럼 되었다. 정 대표는 이런 과정에서 우리 전통주의 우수함을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3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전통주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술도가를 차리겠다고 전통주 공부를 한 것은 아닙니다. 건강 때문에 교수를 그만두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쉬려고 지금 이곳에 땅과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이렇게 술도가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죠.”
‘예술’이 빚는 ‘동몽(同夢)’, ‘만강에 비친 달’, ‘홍천강 탁주’
정 대표는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동안 배운 전통주 빚기에 열심을 보였다. 때 마침 이곳 홍천 특산물인 단호박 축제가 열릴 즈음 내촌농협 조합장이 이왕이면 단호박을 이용해서 술을 빚어보라는 권유를 해 왔다. 그래서 단호박과 쌀로 술을 빚어서 단호박 축제에 내놓았는데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차제에 술도가를 차려서 본격적인 전통주 빚기에 돌입한다. 2012년에 ‘전통주조 예술’을 설립 한 배경이다.
술도가 이름을 ‘예술’이라고 한 것은 얼핏 ‘술맛이 예술’이랄 것 같지만 정 대표는 “예로부터 내려온 술의 약칭이 ‘예술’입니다. 때문에 우리 회사 이름 ‘예술’은 단술 ‘예(醴)’자와 ‘술’이 합쳐진 이름이죠, 그리고 술 빚는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정 대표는 예술을 창업하면서 몇 가지 철칙을 세웠다고 했다.
첫째, ‘예술’의 술은 일본식 누룩(입국)이나 개량식 누룩을 사용하지 않고, 고유의 전통누룩을 원료로 수작업으로 빚는다.
둘째, ‘예술’의 술은 아스파탐 같은 인공감미료 및 화학첨가제를 일체 넣지 않는다.
셋째, ‘예술’의 술은 장기간 저온에서 완전 발효․숙성시킨다.
이런 대 원칙으로 개발된 술이 ‘동몽(同夢)’, ‘만강에 비친 달’, ‘홍천강 탁주’다.
“‘동몽(알코올 17%, 생약주)’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술의 특성을 뜻하지요, ‘만강에 비친 달(알코올 10%, 생탁주)’은 만개의 강에 달이 비친다는 의미인데 부드럽고 달콤해 여성적입니다. ‘홍천강 탁주(알코올 11%, 생탁주)는 홍천 찹쌀과 멥쌀, 전통누룩을 원료로 하여 옹기에서 140일 발효․숙성시킨 이양주(두 번 빚은 술)입니다.”
예술이 빚은 술을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프리미엄급을 취급하는 술집에서 주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술 빚기를 시작한지도 4년으로 접어들었다.
좀 더 좋은 술 빚기 위해 잠시 술 빚기 중단
정 대표의 고민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된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 대표는 우선 새로운 형태의 누룩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술 빚는 방법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누룩으로 술을 빚기 위해 8월말까지 술 빚기를 중단했다고 설명한다. 홈페이지에 방이 붙은 이유다.
-그러면 손님들이 다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술은 퀼리티가 중요합니다. 우리 술을 아시는 분들은 종전의 술 보다 더 맛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찾게 됩니다.”
마치 개구리가 보다 멀리 뛰기 위해서 자세를 낮추는 것처럼 정 대표는 6개월 간 움츠리고 있다. 그 때 어떤 술이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53도짜리 증류식 소주도 함께 출시한다고 하니 기대충만이다.
6개월 동안 1천여 명 체험장 다녀가
정 대표는 그 동안 쌓아온 전통주와 누룩 빚기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전통주를 널리 알리는 데 체험행사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림축산식품부에 ‘찾아가는 양조장’ 지정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이유인즉, 강원도가 고향이 아니요, 전통주를 업으로 살아왔던 것도 아니요, 양조장집 아들도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찾아가는 양조장’을 신청할 때 제일 큰 걸림돌이 ‘시설의 역사성’이었다.
그러나 고시 공부를 했던 고집과 노력을 경험 삼아 마침내 ‘2015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지난 해 10월부터 최근까지 1천여 명이 넘는 체험객들이 다녀갔다.
체험 비용은 전통주 강의와 시음, 견학 등 1시간 코스가 1만원이고, 여기에 누룩을 만드는 간단한 체험을 더하면 2만원, 전통주를 빚는 과정까지 포함하면 5만원을 받는다. 물론 어느 정도 인원(10명)이 차야 한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하면서 전통주와 누룩을 빚으며 술에 대한 강의를 듣는 코스는 1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정 대표는 “전통주 체험을 통해서라도 전통주를 널리 홍보하여 우리의 국민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본의 사케, 중국의 빠이주, 프랑스의 와인처럼 우리에게도 나라를 대표할만 한 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소주나 맥주를 많이 마신다고 우리나라의 대표 술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아직 밖같 날씨는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쌀쌀하다. 더욱이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감과 함께 차갑게 느껴지게 하는 모양이다.
어느 스님이 ‘예술’에 와보곤 “아니 이런 터가 있었는가. 이 자리에 절을 세웠으면 좋았을 걸”했다고 했단다. 몇 시간 머무는 사이에 기자도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땅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아무나 욕심낸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 대표와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잘 나가던 헌법학자가 어느 사이엔가 전통주 장인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법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처럼 제대로 된 술 맛을 찾기 위해 과감히 술 빚기를 중단을 선언한 정회철 대표의 오기와 고집이 빛을 발휘했으면 한다.
<물걸리 현지에서 글·사진 김원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