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망우물(忘憂物)이 망우물(亡愚物)이 되어선 안 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처놓고 스트레스를 안 받는 사람이 있을까.
소시민들이 보기엔 대통령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고, 최근엔 금뱃지 단 국회의원이거나 아니면 금뱃지를 달려고 바짓가랑이 찢어지도록 뛰는 예비 후보들일 수도 있다.
어느 직종 어느 층을 막론하고 좋든 나쁘든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간다.
스트레스 해소 물질로 심심草 일수도 있고, 시름을 잊게 하는 망우물(忘憂物) 즉, 술일 수도 있다.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의 ‘음주(飮酒)’ 제7수엔 ‘망우물(忘憂物)’이란 구절이 나온다. 직역하면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이며, 이 시에선 술을 가리킨다. 훗날 망우물은 술을 비유하는 말로 널리 쓰였고, 나아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란 뜻까지 갖게 됐다.
술을 전문으로 연구하거나 정신의학을 하는 의사들은 술은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또는 기분이 나쁠 때 마시면 평소보다 몇 배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차주초수(借酒诮愁)라 술로 근심을 달랜다고 하지만 술이라는 물질은 중추신경을 이완시켜 평소에 하기 힘든 말이나 행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쉽게 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취중에 내뱉은 말이라 너그럽게 넘겨줄 수도 있지만 자칫 선배나 상사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또는 시비를 걸어서 평소에 쌓놨던 신뢰를 한 순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재 되어 있던 불만이 술기운으로 분출해서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이 오히려 화를 입을 수도 있어 더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진정 스트레스를 풀려면 과일을 먹거나 운동을 해서 풀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몸이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콩팥의 부신 피질에서 분비되는 코르티솔(cortisol)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이다. 코르티솔은 외부의 스트레스와 같은 자극에 맞서 몸이 최대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분비되어 혈압과 포도당 수치를 높인다고 한다.
즉, 힘이 솟게 되는데 이 힘을 소화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코르티솔 호르몬이 분비되지 못해 우울증에 걸린다. 왕창 스트레스를 받고 이를 푼다고 망우물을 마실 경우 사고를 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코르티솔 호르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작은 스트레스는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글 쓰는 사람한테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당장은 글을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원고를 다 쓰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해방감이 있다. 술은 이런 때 마셔야 덜 취하고 기분도 좋아지게 된다.
술은 우리 일상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물질이다. 그래서 백약지장(百藥之長)이란 말을 듣는다. 그런 까닭에 모임이나 잔치 연회엔 술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력(酒歷)이나 주력(酒力)에 따라 다르겠지만 얼근한 상태를 넘지 않게 마시면 그야말로 망우물이 될 수 있겠지만 지나치면 망우물(亡愚物)이 될 수도 있다.
송나라 때 구준(寇準)이 살아가면서 돌이킬 수 없는(不追) 여섯 가지 후회를 ‘육회명(六悔銘)’에 담아 말했는데 그 중 하나가 ‘취한 뒤의 미친 말은 술 깬 뒤에 후회한다’(醉後狂言醒時悔)였다고 한다.
공자도 예로부터 군자가 주도를 연마하는 데는 술을 적으로 하는데서 시작하여 점차 벗으로 삼은 것이지만 술을 상대로 싸움에 있어 강하기만 한즉 몸을 상하고, 유하기만 한즉 마음을 상한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강과 유를 조화하여 그 묘를 얻지 못하면 주도에 통달할 수 없다고 일갈 한바 있다.
성인도 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간파했는데 한갓 범인(凡人)들은 술에 통달한 것처럼 술을 가벼이 여긴다. 이는 범죄를 저지른 범인(犯人)에 대해 ‘심신미약’상태라고 관용을 베풀어준 잘못된 습관 때문은 아니었을까.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