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사람들과 마시는 술의 의미

 

고향 사람들과 마시는 술의 의미

 

박정근(대진대 교수, 황야문학 발행인, 작가, 시인)

 

 

9월 말이 되었지만 저녁 햇살이 여전히 뜨겁다. 귀향한 후 여름 텃밭 일은 새벽과 저녁에 하곤 한다. 뜨거움과 물 폭탄으로 점철된 기후위기의 시대에 그려지는 농부들의 풍속도이기도 하다. 필자는 뜨거운 낮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에서 글을 쓰다가 바닷물이 붉은 노을로 물들기 시작하면 텃밭으로 돌아와 일을 한다. 햇볕이 한참 누그러졌는데도 삼십분 정도 일하면 내의가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다.

 

작년에 귀농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배추와 무를 텃밭에 심었었다. 초보 농사꾼이 김장용 배추와 무를 스스로 재배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하지만 때 이른 허풍은 무더위로 인한 벌레들의 공격에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배춧잎에 조금씩 생기던 구멍이 벌레들의 잠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배추밭이 벌레들에게 장악된 후였다. 벌레들의 게릴라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약을 뿌렸지만 배추는 처참하게 구멍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올해는 작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번에 심는 밭은 동진면 귀농의 집이 아니라 시월 말에 이사할 변산면 마포리 밭이다. 동네 사람들이 가끔 지나가면서 필자가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농사의 기본을 잘 모르고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무모함이 안타까운지 한 마디씩 훈수를 두기도 한다. 동네 선후배들도 집을 지으려고 성토한 땅에 보강재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 걱정 반 훈수 반의 이야기를 한다. 귀향한 책상물림의 학자가 농사를 짓고 집을 지으려는 시도를 격려하는 차원이리라. 필자는 그들에게 술 한잔하자고 청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선후배라 당연히 옛날로 돌아간다. 어렸을 때 고향의 모습을 그리면서 현재의 변화가 주는 불만을 토론한다. 아름다웠던 벚꽃들이 신작로를 동굴처럼 둘러싸며 마치 낙원에 들어온 듯 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벚나무들이 늙어 죽어버리고 흉측스러운 나무 밑둥치를 모두 베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까운 주민들이 마치 자기들의 밭이라고 되는 양 이런저런 채소를 심고 있다. 동네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하찮은 이권에 눈이 먼 모습이 좀 안타깝다. 필자는 선후배들에게 술을 권하며 불편한 마음을 토로한다.

“마을에 노는 땅도 많은데 왜 옛날처럼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지 않고 알량한 채소를 심어 통행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까? 옛날처럼 벚나무를 심어봅시다. 선배들이 나서서 동네복원 사업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벚꽃은 참 아름다웠지. 지금은 옛날 우리 동네 벚꽃이 아름다웠던 사실을 모르는 외지인이 많이 들어왔어. 그리고 자기 집 앞의 도로부지를 사유화해버린 사람들이 많아서 동의하지 않을 거야. 그 땅을 도로부지로 환원하라고 하면 이권을 지키려고 싸우려고 한다고. 그러면 동네가 시끄러워 질 수밖에 없어.”

 

고향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싶은 필자의 소망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전원마을의 정취를 즐기려고 귀향을 했는데 지금의 고향은 옛날의 고향이 아니다. 강한 노스탤지어가 발동하면서 술을 들이키지 않을 수 없다. 동네 골목도 새롭게 단장을 해버려서 옛날 돌담길은 사라지고 없다. 새로운 편리함이 구식의 고리타분함을 밀어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우리들의 기억은 옛날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 나이가 들수록 미래 못지않게 과거로 향하는 것이 인간의 관성이다.

고향선후배들과의 술자리는 고향에 대한 사랑과 불만을 길게 늘어놓으며 길어진다. 필자는 옛날 고향가게를 사서 마트를 했던 동문선배에게 왜 그 집을 팔아버렸냐고 푸념을 한다. 그는 빚보증을 잘못 서 가게가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오래전 부친께서 간척사업에서 실패하시면서 화병으로 쓰러지셨다. 부친 병간호를 하던 모친도 디스크를 앓게 되어 고향을 떠나 필자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 등을 졌던 고향에 필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양철지붕 가게를 하던 부모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공간을 살피면 옛 생각이 절로 난다. 서울에서 교직을 하느라 병든 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는데 후배들이 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마워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필자는 그에게 술을 권하며 고마움을 전한다. 이 순간에 술은 내 마음을 담은 눈물이요, 고마움이요, 그리움이다.

고향집을 바라보며

 

박정근

고향 옛집이 그리워

마포에 돌아왔지만

고향집은 사라지고 없다

 

조석으로 여닫던 점방 양철문 소리

스르륵 스르륵

늦잠 자던 귀에 아직도 들려오는데

떠나간 가족은 돌아오지 못하고

 

옛 집터에 와보니

붉은 양철지붕은 보이지 않고

철제 컨테이너 빌딩이 멋없이 솟아있는데

아줌마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물 뜨러 오던

깊은 우물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인근 마을 손님들로

북적이던 마포삼거리 이제 썰렁하고

가끔 격포 채석강 내소사로 가는

승용차만 달리고 있다

 

하지만 고향 마포여

봄마다 벚꽃으로 동굴을 만들던 마을이여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시인이

새집으로 단장한 낯선 골목에서

바라보는 소나무 한 그루

산등성이에 홀로 서 있고

 

고향 찾은 늙어가는 그대여

흩어진 가족들이 사라진 집 앞에서,

향수에 젖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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