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별주의 눈물, 임진왜란의 그림자 속 사랑

송별주의 눈물, 임진왜란의 그림자 속 사랑

 

박정근(문학박사, 대진대 전 대학원장,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임진왜란의 불길이 한반도를 휩쓸던 그해, 부안의 여류시인 매창은 사랑하는 유희경과 이별의 잔을 기울여야 했다. 매창은 조선 후기,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3대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조선 시대는 유교의 영향으로 여성이 시를 써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기가 극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시를 통해서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자신의 감정과 세계를 섬세하게 담아낸 인물이었다. 그녀의 시편은 일상의 정취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매창이 사랑한 유희경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시인이었으나, 국가의 위기 앞에서 그 역시 의연하게 의병으로 출정해야 했다. 전란의 소식은 사랑과 예술마저도 흔드는 폭풍이었다. 그들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의 맹약을 했지만, 아직 사랑의 단꿈을 꾼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짧은 사랑의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 쌓아온 정과 이해는 어느 연인들보다 깊었다. 매창은 떠나가는 연인의 소매를 붙들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나이가 국가를 구하러 간다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떠나시는 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주는 제의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리라. 헤어지기 전, 매창과 유희경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송별주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담은 시와 노래로 아쉬움을 달랬다.

이 장면은 단순한 애틋함을 넘어, 조선 시대 남녀 간의 사랑과 사회적 책임, 예술적 이상이 교차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님이 떠나시지만 개인적인 안위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강력한 도덕적 의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전쟁이란 외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더 상위적 가치와 사랑을 가슴에 품고자 한다. 이런 심리적 극복의 과정은 개인적 안위나 육체적 욕망을 넘어서게 한다.

그들은 통속적인 연인들이 추구하는 에로스적 사랑과 거리를 둔다. 그들의 사랑은 세속사회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지닐 수 있다. 떠나가는 임과의 이별로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김소월의 시처럼 가시는 걸음마다 꽃잎을 깔아서 보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매창은 유희경과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시로 승화한다. 유희경 또한 떠나는 길에 남길 시구를 마음속에 새겼다. 그들의 만남과 이별은 전란이라는 시대적 격변 속에서 사랑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작은 항거였다.

물론 국가 간의 전쟁을 위해서 개인적 사랑을 희생하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인들은 전쟁이 개인적인 사랑과 삶을 파괴하고 훼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후기는 가부장적 가치가 팽배한 유교 사회가 아닌가.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질 수 있는 충효를 강조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유교적 가치에 젖어있는 매창과 유희경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개인적인 에로스적 사랑은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매창의 시는 단순한 개인적 슬픔을 넘어,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상실과 그리움을 기록한다.

그 술잔 속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살았던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 그리고 사랑과 예술이 전란 속에서도 어떻게 꽃피웠는지를 엿볼 수 있다. 송별주의 잔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로하며, 전쟁으로 인해 앞으로 닥칠 시련을 견디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는 전쟁과 사건의 기록으로 남지만, 사랑과 예술의 순간은 그보다 더 오래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 쉬며 전해진다. 이것은 국가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적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성과는 영 다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오래 남아서 영향을 주는 것은 충효라는 도덕적 가치보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것은 형이상학적 가치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매창과 유희경의 송별주는 단지 한 시대 여성과 남성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적 폭력과 인간적 감정이 어떻게 맞닿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증거다. 필자는 이렇게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송별주의 잔〉’이라는 시를 쓴다.

 

부안의 기생 매창이여,

꽃잎이 흩날리는 저녁

창가에 달빛이 잠시 머무르면

그대 손에 쥔 잔이

마음에 번진 그리움만큼 무겁다

 

임진의 칼바람이 등을 스치니

그대는 의병의 길로 나아가야 하고,

나는 여기, 연못가에 남아

술잔에 담긴 사랑의 기억을 마시노라

 

한 모금, 그대 향기 스며오고

두 모금, 지난날 사랑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입술에 웃음이 번지는데

마지막 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눈빛만으로 사랑을 함께 나누며 기도한다

저 달빛 아래 잔이 부서지지 않기를

 

이제 내 마음은 그대와 함께 흔들리고

떠나는 길이 험할지라도

내 시 한 줄, 그대 가슴에 남으리

그대여, 전쟁 속에 나를 잊지 말고

나도 이 잔 속에 그대를 새기리

이제 곧 헤어짐에 마음이 아프지만

사랑이 남겨준 영원의 시간이리라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