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KBS PD 朴仁圭 씨가 퇴직 후 낙안 골에서 전통주를 빚는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의 우리 술 복원, 계승을 꿈꾸다”
朴 仁 圭(株, 낙안명주 대표이사)
내 고향은 전남 순천 낙안읍성(樂安邑城) 민속마을이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 토성이었던 것을 200년에 걸쳐서 석성으로 정비한 것이 낙안읍성이다. 왜 문화재청에서 낙안읍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분차군 또는 분사군이라고 했고, 낙안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처음으로 정해졌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호남가에 낙안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낙안은 조선 시대에 꽤 큰 고을이었음이 분명하다. 낙안성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수원화성이 도성이라면 낙안성은 조선시대 왜구로부터 방어를 위한 전략적 계획도시인 셈이다. 그래서 낙안은 호남가(湖南歌)에 이렇게 나온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허고/ 제주 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성을 비쳐있고-<중략>―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낙안이요/ 부자형제 동복이로구나/ 강진의 상고선은 진도 건너갈 제/ 금구 금을 일어 쌓인 게 김제로다”
낙안은 그 지명으로 봐서 자급자족하며 살기 좋은 계획도시였음이 분명하다.
낙안은 ‘즐거울 樂, 편안할 安’으로 즐겁고 편안하니 말 그대로 새기자면 ‘파라다이스’인 셈이다. 그래서 호남가에서도 ‘사농공상 낙안이요’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전국에 6개의 민속마을이 있지만 마을 주민이 직접 살면서 민속마을을 유지하는 곳은 오직 낙안이 유일하다.
그런 고향을 둔 나는 직장(KBS)에서 정년을 하면 고향에 내려와서 살고 싶었다.
낙안사람들의 특성은 드세다는 것이다. 낙안 골을 둘러싼 산이 다 700미터에 달하는 험산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연화형이나 목련형이지만 옥녀산발형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재임 중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낙안 수령방백이 얼마나 기가 드셌으면 서울에서 내려온 목민관을 우습게 아는 게 도가 지나쳤던지 임경업 장군은 토기로 갓을 만들어 쓰게 했다고 한다. 무거운 갓 때문이라도 고개를 숙이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낙안 사람들의 기질은 근세에도 이어져 반골 기질이 강한 동네로 통한다. 일제강점기 만주 항일무장 독립투쟁의 실질적인 대부였던 홍암 나철 선생이 이 고장 태생이고 국창 송만갑, 가야금 병창 중시조 오태석이 이 고장 출신이며 우리 민중예술의 아름다움을 일깨운 앵보 한창기 선생이 이 고장 출신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선생도 이 고장이 낫고 키운 사람이다.
이런 고향에 대한 생각이 나를 정년 후 고향으로 낙향해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게 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나는 정년을 5년 정도 앞두고 인생이모작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에 빠졌다. 백세시대라는데 정년하고도 40년을 등산이나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귀농·귀촌을 하기로 맘 먹고 농사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귀농·귀촌 본부에서 추진하는 교육도 꾸준히 받고 텃밭 농사도 지어봤다.
그러나 정년하고 농사를 짓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귀농·귀촌 강사들의 강의가 도움이 되었다. 직접 농사를 짓지 못하면 농촌에서 생산되는 1차 생산물을 활용한 가공 사업을 구상해 보라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국방송공사에서 30년을 프로듀서로 일했다. 프로듀서 사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이템이 잡히면 일에 절반은 끝난다” 그랬다. 나는 귀농 대신에 고향으로 귀촌을 하기로 방향을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가공 사업이 무엇이 있을까? 조사하기로 했다. 평상시에 발효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고향에서 발효음식 관련해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분야가 무엇일까 찾아보았지만, 간장 된장 고추장 전통한과 등 모든 민속마을과 연계해서 해볼 만한 가공 사업은 모두 다 경쟁자가 있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없는 가공 사업이 있었는데 그것이 ‘알코올발효’를 통한 우리 술 만드는 사업이었다. 낙안에 전통주는 ‘사삼주((沙蔘酒)’와 ‘강하주(薑荷酒)’가 있었고, 강하주는 그 맥이 끊어진지 100년이 넘었고, 사삼주는 1990년대 낙안양조장을 운영하던 박형모 대표가 복원해서 생산하다가 7~8년 전부터는 그마져도 생산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유지 발전 시켜야할 낙안읍성민속마을에 낙안을 대표하는 우리 술이 없다는 것 또한 내가 우리 술을 택하게 만든 중요 요인 중에 하나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은 사적 302호로 순천만이나 순천만 정원을 찾는 방문객들이 꼭 들려가는 곳 중에 하나다. 연간 방문객이 120만 명에 이른다. 나는 이들을 위해서 낙안민속마을을 대표하는 전통주를 복원하던가 전통방식의 우리 술을 빚는 차별화 된 우리 술 가공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아이템이 정해졌으니 그 다음부터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 우선 우리 술 공부를 시작했다. 막걸리학교를 21기로 수료하고 국세청 양조교실, 가양주연구소, 전통주연구소와 개인적인 사사를 통해서 우리 술 만드는 법을 배워 나갔다.
2015년 9월 정년하고는 고향으로 귀촌해서 어머님 간병을 하는 한편으로 우리 술 양조장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우선 지방자치 단체장의 추천을 받아서 국세청에 지역특산주 면허를 신청하고 생산 기반 시설을 준비했다. 지역특산주 면허는 시설 기준이 비교적 간단하다. 일단 작업장 10㎡ 만 있으면 가면허가 가능하고 양조설비를 갖추면 본 면허가 가능하다. 2016년 1월에 지역특산주 본 면허를 순천세무서로부터 받았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술은 막걸리가 아니다. 조선시대 전국 팔도에 1,400가지가 넘는 우리 술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60여 년 동안 증류주 몇 종, 탁주와 청주 몇 종을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술은 사라진 1,400종의 우리 술 중에서 곡물 특유의 청향을 간직한 술이다. 내가 만들 술의 상업명(브랜드 네임)도 정하고 라벨도 시험 제작해 보았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술의 이름은 ‘납월홍매(臘月紅梅)’다. 납월은 음력 섣달을 일컫는 말로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달이라하고, 더 옛날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달이라하여 “납향 납(臘)”자를 써서 섣달을 ‘납월’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사랑했던 매화가 ‘납월홍매’다 납월은 겨울의 한복판이고 바깥에 매서운 한파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계절이지만 이 시기에 선홍빛의 붉은 매화를 터뜨리는 게 ‘납월홍매’다.
난 30년을 언론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며 나름 언론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언론인이었으나 언론인의 표상이 되는 데는 미흡했다. 그런 자성의 의미와 엄혹한 현실에서도 소신과 기개를 굽히지 않는 ‘납월홍매’가 맘에 들었다. 그래서 상표명에 스토리텔링을 담아서 내가 만들 술 이름을 납월홍매로 정했다. 납월홍매는 브랜드 네임이라 술 속에 매화와 관련된 부재료가 들어가지는 않는다. 두꺼비라는 소주에 두꺼비가 없듯이 말이다. 우리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삼양주로 쌀, 누룩, 물 이외에는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고 만든다. 그러다 보니 술의 도수는 18도 정도로 높다. 하지만 전통방식으로 만든 우리 술은 요즘 시중에서 시판되는 막걸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목 넘김이 좋고 풍미가 뛰어나며 마시고 나서도 트림이나 숙취가 없는 진정한 우리 술이다.
납월홍매가 주력이 되겠지만 10여 가지 한약재를 넣어 만들 잔치용 술인 합환주 ‘좋은날’과 이화곡을 사용한 떠먹는 술로 이화주로 불리는 ‘두입술’ 그리고 오디를 넣은 ‘오디세이’등 몇 종류의 새롭게 개발한 전통주와 낙안읍성의 전통주인 사삼주와 과하주의 일종인 강하주를 복원하여 오는 5월쯤 전통주 양조장을 열려고 준비 중이다.
‘납월홍매’라는 술 이름이 낯설겠지만 납월홍매는 겨울에 피는 붉은 매화로 겹꽃인 경우가 많고 향기가 좋아서 설중매라고도 불리는 매화다. 낙안읍성에 1980년 까지만 해도 수 백 년 된 납월홍매 고목이 있었지만 수령이 오래 되어 고사하고 그 씨앗으로 키운 2세대가 낙안읍성 뒤편 금전산(668m) 기슭 금둔사(金芚寺)에서 자라고 있어 매년 섣달이 되면 탐매 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10현으로 불리었던 최광유는 ‘납월매’를 예찬하는 이런 시를 남겼다.
“찬 서리 고운 자태 사방을 비춰/ 뜰가 앞선 봄을 섣달에 차지했네/ 바쁜 가지 엷게 꾸며 반절이나 숙였는데/ 개인 눈발 처음녹아 눈물어려 새로워라…”
또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분인 상촌 신흠 선생 시에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일생 동안 추위에 향기를 팔지 않으며)’이란 구절이 나온다.
그야말로 매화의 자태처럼 도도함이 보이지 않는가.
그다지 술꾼은 되지 못하지만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를 무척 좋아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길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술익는 마을’ 나는 이 키워드가 좋다.
낙안읍성민속마을에는 초가집이 200여 채 있다. 그 초가집 마다 우리 술을 한 가지 이상 빚어서 낙안읍성민속마을이 ‘남도의 술 익는 마을’이 되도록 만드는 일을 돕고 싶다. 그것이 내가 우리 술을 배워서 고향에 기여하는 한 방편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내가 만들어 낼 우리 술은 ‘납월홍매’의 향기와 소신을 굽히지 않는 조선 선비의 정신을 생각하며 마시는 술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또한 전통주를 복원, 계승하는 일에 있어서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우리 술에 대한 소신과 애정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명함에 새겨 가지고 다니는 문구가 있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의 우리 술 복원, 계승을 꿈꾸다”
내 인생 이모작의 좌표이자 꿈이다.
글쓴이 朴仁圭(株, 낙안명주 대표이사)는 KBS PD로 콘텐츠 본부, 제3라디오 등에서 30여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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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생각
추위를 심하게 타지는 않지만 봄이 그리울 때가 있다. 뉴스엔 봄의 전령사 금둔사 납월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납월홍매 소리를 들으니 주명(酒名)을 ‘납월홍매’로 정하고 술 빚기를 시작하겠다는 박인규(60세) 씨가 생각났다.
연락을 취하니 낙안읍성으로 내려오란다. 술 공장 준비는 잘되고, 언제쯤 술이 나오느냐는 따위는 묻지 않고 순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남녘의 봄 햇살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막상 박인규 씨를 만나보니 술도가라고 하기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박인규 씨를 만난 날 관할관청으로부터 ‘지역특산주’ 본 면허가 나왔단다. 그래서 행정적인 절차를 모두 끝내고 본격적으로 공장도 짓고, 시음장도 마련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러면서 그가 빚은 술을 내놓는다. 부실한 안주를 탓하지 않고, 몇 잔을 내리 마셨다. 썩 괜찮은 술이었다. 이런 술을 가리켜 앉은뱅이 술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편집자는 그에게 부탁했다. 방송국 PD 생활을 마무리 하고 전통주를 빚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직접 원고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박인규 씨가 글과 사진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