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③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③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치명적 유혹, 유방의 알레고리

 

생명의 핏줄로 여성의 ‘유방(breast)’은 고대로부터 숭배와 예술의 대상이었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고대의 조각상은 풍요를 기원하는 ‘신화’를 담고 있다. 이미 인체의 과학적 구조가 밝혀진 현대 사회에서도 유방을 둘러싼 ‘신화’는 여전하다. 과거의 신화는 신비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현대의 신화는 성적 의미를 주로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르네상스가 인간의 육체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인간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 것은 ‘유방’이었다. ‘유방’은 생명감의 상징이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줄 자체로도 인식되었다. 그것은 목적미의 대표적인 준거 틀이기도 했다. 과연 목적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분히 설명적이긴 하지만 하나의 논리적 아름다움이다.

스탠포드 대학 <여성과 성별 연구소(Research Center for Gender and Development, CGAD)>의 원로학자인 매릴린 옐롬(Marilyn Yalom)은 그녀의 <유방의 역사(A History of the Breast)>(1997)에서 “여성의 유방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인류 역사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갖는 유방의 함의(含意)와 여성의 유방이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남성과 제도가 전 역사를 통하여 여성의 유방을 제멋대로 전유(專有)하기 위해 기울였던 다양한 노력의 면면들’을 기술하였다. ‘신성한 유방’, ‘에로틱한 유방’, ‘가정적인 유방’, ‘정치적인 유방’, ‘심리학에서 본 유방’, ‘상업화 된 유방’, ‘의학에서 본 유방’ 등에 담아 고발하였다. 이는 모두 남성 소유의 가슴을 원 소유주에게 돌려달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해방된 유방을 향한 전초이며, 새롭게 시작되는 유방의 역사를 통해 주인 된 권리를 주장하는 역설적인 항변이다.

 

저자는 아내에서 남성과 남성이 만들어낸 법률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내의 역사는 속박과 순종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고대에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었다. 중세에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합법이었으며, 아내는 출산의 그릇이었다. 불과 150여 년 전까지도 결혼하면 여성의 모든 권리는 남편에게 넘어갔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내의 역사는 고난과 슬픔의 역사였다. 하지만 오늘날 전통적인 의미의 아내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책은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결혼과 아내상의 변화를, 실존했던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제도와 관습을 중심으로 조망하여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또한 인습과 맞서 싸워 나간 평범한 여성들의 내밀한 속내와 살가운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구약성서, 그리스‧로마 신화, 중세와 근대의 수많은 문학작품, 현대의 각종 신문기사와 광고, 엄청난 연구자료 분석 등을 통해 아내의 개념과 지위, 역할 등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변해 왔는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설명한다.

옐롬은 유방의 변천사를 다음과 같이 9가지로 구분하였다. 여신, 여사제, 성경속의 여성, 성녀 및 성모 마리아 등을 ‘신성한 유방’으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 달콤한 골짜기로서 ‘에로틱한 유방’으로, 어머니의 젖으로만, 아내의 매력으로 만의 ‘가정적인 유방’으로, 국가를 위한 가슴 ‘정치적인 유방’으로, 정신분석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전쟁터로 ‘심리학에서 본 유방’으로서, 유방, 시장통에 내걸리다의 ‘상업화된 유방’으로서, 생명의 부여자이자 생명의 파괴자로서 ‘의학에서 본 유방’으로서, 남성의 것에서 이제 여성의 것으로 ‘해방된 유방’으로서, 그리고 환상과 위기에서 유방을 구하라로서 ‘새롭게 시작되는 유방의 역사’로 구분하여 유방이 지닌 시대별 기능으로 고찰하고 있다. 유방의 원초적 기능은 육아의 수유 기능이자, 남성의 성적 기능이다. 그런데 후자의 측면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무려 9가지 측면에서 전개시키고 있다. 남성들은 이상의 9가지 유방에다 술잔을 만들어 그것이 갖는 의미로서 마시고자 하였다. 모두 관능적 측면과 모성애적 관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개의 남성들은 유방을 감싸 안듯 유방형 술잔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안고 마신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Ⅰ세(Francis Ⅰ)가 즉위한 다음 이탈리아로 부터 많은 예술품들과 예술가, 학자들을 데려와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널리 퍼지게 한다. 그 자신 퐁텐블로나 루아르(Fontainebleau Loire) 강변에 많은 아름다운 이탈리아식 궁성을 지어 그 안에서 연극, 무도회, 음악회 등을 열어 생의 즐거움을 구가함으로써 프랑스에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게 된다.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 1524〜1585)는 이 시절에 생을 즐긴 사람이다. 시골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2살 때 프랑수아Ⅰ세의 블루아 왕궁(Château de Blois)에 시동으로 들어가 장래에는 군인이나 외교관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중병을 앓은 끝에 반 귀머거리가 되어 그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그 대신 문필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로 결심하고 시골로 돌아가 고대 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계속하여 파리에 올라와 당대의 석학 도라(Dora)의 지도 아래 약 5년간 고대 문학 특히 그리스 시인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시인들의 작품을 모방한 시를 썼으나, 차츰 독창적이며 순수하고 서정적인 시를 쓰게 되었다. 그가 26세 되던 해부터 30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사이에 그의 시작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의 이름은 궁중과 시단에서 유명해졌고, 그의 시집은 계속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피에르 드 롱사르는 관능적이며 애수에 찬 기질에서 항시 새로운 모습과 절묘한 형식으로 사랑을 노래했다. 동시에 자연을 깊이 사랑했던 그는 자연과 내적 일체가 된 시인으로서 사랑과 자연의 참다운 서정 시인이었다. 롱사르는 의심할 여지없이 ‘유방 찬미가’이다. 카산드라(Cassandre)에게 바치는 수많은 연애시에서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그녀의 ‘아름다운 유방’과 ‘숫처녀의 순결한 유두’, ‘젖이 흐르는 잔디밭’, ‘훤칠한 목’, ‘너무나 순결한 유방’, ‘젖의 언덕’, ‘매끄럽고 흰목’, ‘상아색 유방’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마치 ‘그녀의 유방을 더듬을 수만 있다면 비록 비천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자신이 왕보다 행운아일 거라고 말한다’ “… 때때로 내 손은 아무도 모르게/ 고결한 사랑의 법칙을 어기고/ 나를 불태우는 당신의 유방을 찾습니다.”라고 말했듯이 때로 그의 손은 그의 머리에서 내리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니 그러면 틀림없이 더 큰 욕망이 일어날 터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그렇게 미칠 것 같은 욕망으로

내 사랑하는 이의 유방을 만지지 않았어야 했는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잔인한 운명이 저 황홀하게 아름다운 유방 아래서

그렇듯 맹렬한 불길로 날 에워싸며 집어삼킬 줄을.

 

롱사르가 유방에 대한 많은 은유를 그 이전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시인들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차례나 그는 페트라르카의 전통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유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벼룩으로 변모하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아리오스토 스타일(Art Nouveau-style, decorative arts)로 여성의 유방을 ‘나란히 흘러나오는 두 줄기의 젖’이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지상의 낙원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롱사르가 마음속에 그린 대상은 시적인 허구만은 아니었다. 카산드라는 프랑스 왕을 위해 일하는 피렌체 은행가의 딸로서 실존 인물이었고, 실제로 육감적인 그녀의 모습은 젊은 롱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연애에 관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에로틱한 유방-4 / 메릴린 옐롬(Marilyn Yalom)

 

잔인한 사랑이 그의 불길로

내 가슴을 불태운 순간부터

나는 그의 신성한 격정으로 불타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네.

 

삭발수사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에게 청혼할 수 없었던 그는 1546년부터 1552년에 이르는 기간을 그의 최초의 일련의 연애시를 쓰는데 바쳤으며, 이것은 <사랑(Les Amours)>이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시집이 발간되었다. 힘찬 표현 양식과 풍부한 이미지로 연인에 대한 찬사와 간청 및 한탄이라는 연애시 형식의 전통적 특징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이탈리아 ‘칸초네(canzone)’의 해설자로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표지를 넘기면 초상화를 새긴 두 개의 원형 양각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시인 롱사르의 초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유방을 드러낸 카산드라의 초상화이다.

  


<Les Amours 권두 삽화>

카산드라가 이 초상을 위해 직접 발가벗은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것은 그녀가 아직 한창 발랄했던 20세 때의 초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로마의 시인처럼 월계관을 쓰고 우아하게 늘어뜨린 휘장을 걸치고 있는 롱사르는 건너편에 있는 그의 뮤즈 카산드라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삭발수사인 롱사르가 아름다운 카산드라를 향한 에로틱한 사랑에 몸부림치는 자신의 고통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그녀의 벌거벗은 유방을 그의 책 권두에 제시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흔한 일이었다.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그림 중에 임신한 여인이라는 주제를 빼놓을 수 없었다거나 유독 유방을 줄기차게 그렸던 것은 여성미의 남성과 다른 특질을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고자 하는 소박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중세에서 그림은 애오라지 성화(聖畫)가 전부였다. 성당 벽면을 장식한다는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이 오랜 기간 화가들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인간을 발견했을 때 이를 어디에 표현할 것인가가 숙제로 부상했다. 성과 속이 혼재하던 시절, 그림은 모두 성화로만 그려져 왔던 것이기에 이제 성화에 표현되는 인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도전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유방이 목적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동물들에게 있어 유방은 성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방이 상징이 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 있어서 만이고 인간만이 유방을 애무하기를 즐기게 된다.

 

<아프로디테의 대리석 흉상의 젖가슴>

 미술사를 통틀어 예술가들이 유방의 아름다움을 가장 감격적으로 묘사했던 때는 르네상스 시대다. 이 시대가 얼마나 유방을 열광적으로 찬미했는지는 15, 6세기에 유방 모양의 분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유행한 것으로 잘 알 수가 있다. 유명한 ‘뉘른베르크(Nuremberg)의 청춘 분수’는 유방에 대한 르네상스 인들의 욕망이 정점에 달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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