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칼럼
깡그리! 홀라당!
권 녕 하 시인·문학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치매 증상이 생겨서 정확한 숫자를 세지 못하지만, 아마 98명 혹은 99명 쯤 될 것이다. 10년 이상 이 짓을 해왔는데, 날이 갈수록 기운이 빠지고 힘이 더 든다. 이제 나도 많이 늙었나보다. 백 명을 다 채우면, 젊은 청춘으로 사람으로, 온전하게 변신해 이 세상천지를 활개치고 다니며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광경을 상상해보는 순간, 없었던 힘도 샘솟듯 불끈 솟아올라 팔다리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달이 떴다. 자정이 지나자 성황당 고개마루턱에 자리를 잡았다. 곰곰이 생각하며 두 눈 지긋하게 감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그래, 두 사람만 더 잡으면~ 되는 거 맞지?” 스스로에게 달래듯 소곤소곤 말하다가, 점점 큰 목소리로 힘을 북돋아본다. 둘! 둘!! 둘!!!
이때였다. 어스름 달빛 그늘을 지나 아리따운 처녀가 고개 마루턱에 자태를 드러냈다. 옳지! 오늘 해치워야 할 일감이 제 발로 걸어오는구나! 발걸음도 예쁘게 향기로운 분내와 달콤한 체취를 풍기며 다가오는구나! 노랗게 떠오른 둥근 달, 그 황홀한 빛의 세례를 받으며, 살살 잘 구슬리며 오늘밤도 열락의 한 때를 보낼 수 있겠구나.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육신, 지친 팔과 다리를 오늘밤은 혹사시키지 않아도 되겠구나! 젊을 때 같지 않아서 제자리 뛰기도 힘든 요즈음 제 발로 사쁜 사쁜 걸어오는 안성맞춤의 처녀여!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요 예쁜 처녀가! 고개마루턱 까지 올라오더니, 미리 와서, 자리 잡고 앉아있는 내 앞에서, 유연한 몸매를 비틀며, 홀짝 훌쩍 재주를 넘고 있지 아니한가! 가늘고 긴 속 눈썹을 달빛아래 반짝이며 훌렁 훌러덩 재주를 넘고 있지 아니한가! 이런! 이런! 사람인줄 알았는데, 처녀인줄 알았는데, 동업자! 아니 경쟁자였단 말인가! 아이쿠! 결론부터 빨리 말해야겠다. 그 처녀는 바로 내 딸이었다. 에미를 닮아서, 사람이 혹할 정도로, 기가 막히게! 예쁜 내 딸년이었다.
그리고 달빛이 흩뿌리는 결을 따라, 어둠 숲 속으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잦아드는 비명소리가 목울대를 타고 두울! 뚜울!! 뚤!!! 하고, 분명하게 이명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사람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고픈 염원이, 사람이 되고픈 크나큰 열망이 어둠 숲 밤 그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사무치도록 갈구하던 염원도 한 평생 지친 몸을 닦달하던 꿈도 내 딸년을 만난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온 한 평생인데, 몇 발자국 남지 않은 도착지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그만,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영원히!
내가 저지른 한 때의 일탈행위가, 아주 사소한(?) 생리적인 행위 단 몇 번의 그 결과가! 환골탈태의 기회와 희망과 미래를, 깡그리! 경쟁자가 되어 나타난 딸년에게 생명까지 홀라당! 빼앗기고 말았다. 게다가 배냇병신으로 태어난 딸년은 딱하게도 양성(兩性) 변태였는데, 이제 꼼짝없이, 폐족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딸년이 오늘밤, 알고나 저질렀는지 그걸 모르고 있었는지, 폐족 주제에~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