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철 칼럼
어느 곳이 술잔 앞만 할까
임 재철(칼럼니스트)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꽃샘추위지만 꽃들의 계절이다. 집 주위만 봐도 사람들이 키우는 플라스틱 화분과 한 뼘 남짓한 화단에서부터 조금만 외곽을 나가보면 꽃들은 부지런히 자신의 절정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4월이 가고 있다. 세월이 이리 빠른 것인지 생각이 많아진다. 무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에 스스로 고백을 한다. 말하자면 요즘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힐링’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가슴만 문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허무와 아뜩함이 너울대는 세상살이라지만 누구나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일 터인데, 인생 뭐 있냐는 말을 무람없이 뇌까리며 살고 있는 형국이다. 인생 2모작을 한다며 뛰어다니는 모습의 제 자신이 마치 ‘비련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말로 말하면 세상의 운동법칙에 의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고 할까.
이런 필자의 시름과 일렁임 또한 잘못된 지식과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채찍을 가하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는 젠틀한 삶의 기술 한 수를 발견한 순간을 맞이했다.
얼마 전 해거름에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를 만났다. 서울 강북 쪽 모 재래시장 안쪽의 허름한 집이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얘기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연신 웃어대고 있었고, 남자들도 술잔을 앞에 놓고 왁자지껄 했다. 마치 칠십 년대나 팔십년 대 초쯤의 어느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요즘 갈구하고 있는 공동체적인 삶, 화목하고 서로 자신의 애로를 얘기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사 어느 곳이 술잔 앞만 하랴! 이것은 구양수(歐陽脩,1007~1072)의 시중 한 구절이다. 그는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으로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人生何處似樽前’, 그의 호가 취옹(醉翁)이었던 것을 보면 살아생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한 것 같다. 어릴 때 그는 하도 가난해서 문구를 살 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모래밭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글자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가 큰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 어머니 덕분이었을 거다. 그 어머니야말로 진짜 시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기-승-전-일’인 시대를 살면서 해질 무렵 술 한 잔을 앞에 놓고 즐겁게 얘기하는 가게 안에 사람들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그 구절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석양주를 앞에 놓고 하루 일을 오순도순 나누는 이웃, 그리고 친구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꽃이 피고 지나 어디에서든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