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가 먼저였을까

기러기가 먼저였을까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한강문학》발행인 겸 편집인)

옛날 옛적에 한양 땅 북촌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난리가 날 조짐이 무르익고 있었다. 수 삼년 가뭄 끝에 찾아온 백악산 아래 가을 들녘은 바람 불때마다 황량한 먼지만 풀풀 일어나 입동을 앞둔 민중의 시름이 골 깊게 패이고 있었다.

벼슬아치들은 사농공상 시스템을 통치수단으로 정착시켜 민중을 상놈으로 만들고,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고 뜯어먹으며 살고 있었다. 학문권력자 벼슬아치들의 세상 조선. 주자학으로 도배질을 한 조선은 힘을 갖춘 학문권력자들이 살기 참 좋은 나라였다.

그러한 조선 땅에서 벼슬아치들이 한 세상 사는 동안 제일 나쁜 운수팔자는 바로 가뭄이 들 때였다. 그 해에도 최악의 악재가 덮쳤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백성들을 동원해 한강 한 복판 돼지섬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둥 법석을 떨어봤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나 안치면 다행이지, 맑간 하늘에서 비가 올 리가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비가 오겠는가! 자연이 얼마나 공평하고 영험하고 또한 흉폭할 정도로 철저하게 보복하는 능력자인 걸 몰랐단 말인가. 사서삼경에 음양오행에 역술에 물 좋은 기생들 골라 뽑아 관아 한 켠에 척하니 앉혀놓고, 그렇게 재미있는 제도까지 만들어놓고 세상을 즐기며 살던 학문권력자들이 가뭄의 무서움도 몰랐단 말인가!

가뭄 끝에 독이 오를 만큼 오른 끝에 벼슬아치들이 궁리해낸 해결책이란 것이, 부잣집 재산을 터는 것이었다. 삼개나루, 송파나루, 개성상인, 심지어는 세곡선까지 털다 털다 그래도 뱃골을 다 채우지 못하자 학문권력자 벼슬아치들이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경쟁세력의 전답과 재물을 홀라당 빼앗는 방법이었다. 이걸! 잘만 하면, 한 방에 뱃골을 다 채울 수도 있고, 민중들에게는 탐관오리 척결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내세울 수가 있었으니 묘안 중에서도 기막힌 묘안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정적의 재산이라도 무작대기로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 궁리 끝에 역모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작정했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정적에게 누명 씌우는 일에는 이골이 난 벼슬아치들. 그들은 그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임금의 심기를 잘 살핀 다음, 대신 코풀어주듯이 언관을 동원하여 매일 아침마다 임금을 못살 정도로 윽박지르면, 결국엔 못이기는 척 힘이 센 편의 주청을 들어주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동안 벼슬길에서 소외당해 있었던 임금의 외척세력과 작당을 하면 거의 틀림없이 거사는 성공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을 어디 한두 번 했을까! 정적의 재산 빼돌리기는 절대 뒤탈 날 일이 없었다.

이 방법이 더욱 걸작인 것은, 정적의 집안 가솔들을 관노로 만들어 요리조리 물건 다루듯이 도리도리 뱅뱅 돌리면서 함흥으로 보냈다 단양으로 보냈다 강릉으로 보냈다 심지어는 부임지마다 끌고 다녔다 했다. 호의호식하고 고등교육을 받으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천민으로 전락한 아녀자들 중 몇몇은 바닷가 절벽에서 투신하기도 하고 도망쳐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죽자 사자 내 튄 걸 잡아들인다고 추노법까지 있었다던가.

입동(立冬)날, 김포 들판에 기러기가 날고 있었다. 높게 때로는 낮게 두 마리가 또는 십여 마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날고 있는 모습이 신출내기들처럼 오열이 잘 맞지 않았다. 올해 처음 날아온 기러기였나. 매년 시월이면 찾아와서 한 겨울을 나고 이듬해 3월경에 떠났던 고향, 동토를 향해 되돌아 날아가는 기러기들. 그들은 언제부터 김포 들판을 찾아왔을까. 김포에 오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에 어찌 알았을까. 혹시 신석기인들이 쌀, 콩, 조, 기장 등 농사 잘 될 만한 지역을 찾아다닐 때 기러기 따라 쫒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동구 밖 또는 골마다 솟대를 세웠던 까닭이 기러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근역강산(槿域江山)이 땅에 사람이 먼저였을까, 기러기가 먼저였을까. 지난 밤 술안주 삼아 나눈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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