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칼럼
‘삼국사기’의 술(酒) 기록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45〉,〈列傳 제5〉 ‘석우로(昔于老)’ 편에 술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께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을 대접하다가 사신이 만취 상태가 되자 장사(壯士)를 시켜 뜰 아래로 끌어내리고 불태워 죽여 전일의 원수를 갚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 기록에 술에 관한 이야기는 인색할 정도로 기록이 적다. 적진을 향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단기필마로 돌진해 들어갈 때에도, 술 한 잔 하사받고(마시고) -두려움을 누르고- 달려들 법도 하건만, 이런 기록이 단 한 줄도 안 보인다. 왜 일까? 술이 그렇게나 귀중품(?)이었을까?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 ‘귀산貴山’은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은 사람이다. 귀산은 아버지 ‘무은武殷’ 장군과 함께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전투에 출전하여 대승을 거둔다. 전투에 지친 신라군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은’은 후군장에 되어 군의 맨 꼬리에 섰는데, 백제의 복병이 갈고리로 ‘무은’을 떨어뜨렸다. 귀산은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용사는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날까보냐!” 하고 적 수십 명을 무찌르고 자기 말에 아버지(무은)를 태워 보낸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자, 모든 군사들이 보고 용기를 내어 몰아쳤다.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다. ‘귀산’과 ‘추항’은 온 몸에 칼을 맞아 중도에 죽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시체 앞에서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는 동시에 귀산에게 ‘내마柰麻’, 추항에게 ‘대사大舍’의 위位를 추증하였다.
신라의 지배계층이 갖추고 있었던 가치관이 귀산의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지도층의 희생정신! 공동체를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던 신라인의 기상이 엿보이는데 그 정신적 바탕은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 온다.
원광법사는 귀산에게 세속오계를 주며, “불가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류가 열 가지다. 그대들은 왕의 신하이며 자식이 있으니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하고(事君以忠), 둘째, 어버이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事親以孝), 셋째, 벗을 사귀기를 신의로서 하고(交友以信), 넷째, 싸움에 임해서는 후퇴함이 없고(臨戰無退), 다섯째, 산 것을 죽일 때는 가려야 한다(殺生有擇)고 했다.
‘석우로’는 신라 대장군으로써 ‘군사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군사들의 마음을 솜을 두르듯 푸근하게 해준 장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첨해왕沾解王 7년(253)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와서 사관使館에 머물고 있을 때 석우로가 그 접대자가 되었다. 사객使客과 농담하면서 “조만간 네 임금을 염노鹽奴(소금 만드는 자)로 삼고 네 왕비를 취사부炊事婦로 삼겠다”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어 쳐들어오자 “지금의 환란은 내가 말조심하지 않은 까닭이니, 내가 당해야 한다”하고 드디어 왜군에 당도하여 말하기를 “전일의 말은 농담인데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느냐” 하였다. 왜인이 대답도 않고 석우로를 잡더니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올려놓아 불태워 죽이고 떠났다.
석우로의 아들이 뒤에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 되었다. 미추왕未鄒王 때 왜국의 대신이 예방하였다.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께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을 대접한다.
대장군 석우로가 말 실수를 저질렀던 장소에서 ‘술’이 개입된 정황이 드러나고 있고, 석우로의 아내가 왜국의 대신을 사사로이 대접한 현장에서는 ‘술’의 역할이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다. 이 사건을 김부식金富軾은 ‘말 한마디 잘못함으로서 스스로 죽음을 취했고, 또 양국으로 하여금 싸움을 하게 하였다. 그 아내가 원수를 갚았지만 역시 변칙적이요 정도正道는 아니다.’하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 시대에, 신라의 세속오계에 비견할 만한 철학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지도층의 희생정신을 적시해 놓은 사상이 있기나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