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칼럼
강물 따라 노래 따라
“아우라지 지장구 아저씨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아우라지는 ‘정선아라리’가 태어난 지역이다.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한 정선아라리 노래는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준다. 여량에 사는 처녀와 유천에 사는 총각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을 하였는데, 처녀는 매번 유천리 부근에 있는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간다고 하면서 강을 건너가서는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늦은 여름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날, 지난밤 내린 비에 물이 불어나자 처녀는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던 처녀는 아우라지 강을 건네주던 뱃사공을 원망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지장구 아저씨’는 지(池)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아우라지에서 뱃사공을 하면서 장구를 잘 치고 아라리를 멋들어지게 불렀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여량의 아우라지는 서울까지 뗏목이 떠나는 출발점이다. 정선아라리를 뗏목아라리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 틀린 말이 아니다. 정선에서 출발한 뗏목은 한강의 강물을 이용해 나무를 운송하는 수단으로서 조선 초기부터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문인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실린 다음과 같은 시에서 한강 뗏목의 존재가 드러난다.
“朝飛木蜜旆(아침에는 남산 향나무에 깃발 나부끼고)/ 夜泛漢江槎(저녁이 되면 한강에는 뗏목이 떠 있네)”
뗏목은 4월부터 11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아우라지에서 떠날 때 뗏목의 크기는 지름이 40센티미터 정도가 되는 통나무를 8~10개 정도로 엮어서 한 떼를 만드는데, 이것을 동가리라고 하였다. 영월과 중간 지점 정도인 가수리에 도착하면 동가리 6~7개를 엮어서 반 바닥짜리 뗏목으로 만들었다. 영월에 닿으면 평창강으로 불리는 서강(西江)에서 뗏목을 다시 합쳐 한 바닥의 뗏목을 완성하였다. 뗏목 한 바닥은 대략 120개에서 150개 정도의 통나무를 엮은 규모였다.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물이 많을 때라도 닷새 정도는 걸렸다. 영월을 지나면서부터는 물의 양도 많아지는데다 영남으로 내려가는 목재를 내리기도 하고, 서울로 가는 뗏목을 다시 메기도 하는 까닭에 이 부근에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었다.
단양의 매포, 제천의 청풍 등에는 이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술집과 객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우라지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떼꾼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 부른 아리랑을 “떼꾼아리랑”이라고 한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영월 덕포 꽁지갈보야 술판 닦아 놓아라/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 구름만 흘러도/ 팔당 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별여 놓아라“
된꼬까리 여울은 한층 심하게 꼬꾸라질 듯이 흐르는 물살이 있는 곳을 지칭한다. 꽁지갈보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팔면서 떼꾼을 유혹하는 작부(酌婦)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을 꽁지갈보라고 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내려진 단발령을 술집 작부들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복을 곱게 입기는 했지만 머리가 짧아 댕기를 땋거나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을 수도 없게 됐다. 그러자 아예 머리를 뒤로 합쳐서 끈으로 묶어 버리거나 두 갈래로 나누어서 묶는 정도의 치장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떼꾼들이 이들을 가리켜 꽁지갈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니 나름대로 애교스럽고 정감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떼꾼들의 노래를 들은 술집 작부들이 화답한 노래도 있다.
“재작년 봄철이 되돌아왔는지/ 뱃사공 아재들은 또 내려오네/ 놀다 가세요 자다 가세요/ 그믐 초생달이 뜨도록 놀다가 가세요”
이렇게 주고받는 수작을 건넨 다음 뗏목을 풀어 놓은 떼꾼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서울을 향해 다시 떠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포나 청풍에서 상인들에게 뗏목을 넘기고 돈을 챙겨 꽁지갈보와 함께 주색잡기(酒色雜技)로 시간을 보내는 떼꾼도 많았다.
영월이나 정선의 군수 월급이 20원일 때 이곳까지 뗏목을 타고 내려와서 넘기면 30원의 목돈을 벌었다고 한다. 떼꾼들이 뗏목을 넘기고 값으로 받는 목돈을 떼돈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란 뜻으로 지금까지도 쓰이는 표현이다. 결국 떼돈의 유래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뗏목을 넘기고 받는 돈이라는 뜻이 된다.(《한강문학》(10호)에서 일부 인용)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