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명판결이다

김원하의 데스크칼럼

관용이 명판결이다

 

요즘은 온통 수사, 구속, 판결 같은 날선 기사들이 미디어를 장식 한다. 훈훈한 이야기 꺼리가 없어서인가. 국회도 정부도 매한가지다.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지나치다 할 만큼 막말을 토해 낸다.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말들이 서슴없이 정치가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면 이를 놓고, 상대방에서도 경쟁이라도 하 듯 쏟아낸다. 추잡한 말이 귀에 걸려서 깨끗이 씻고 싶지만 그런 깨끗한 물도 구하기 힘든 시절이다. 그렇다고 험한 말 들었다고 귀를 자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 최근에는 검·경이 수사권 조정을 놓고 줄다리가 한창이다. 이러다간 어느 한 쪽이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선다.

최근 이재명 경기지사가 검찰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모두 무죄를 선고 받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소개 되었다. 아직 2심과 대법원(검찰이 항소를 할 경우)의 최종 판결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상당 기간 끌어 왔던 문제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은 이 지사는 10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날아 간 듯 할 것이다.

한편 같은 날 건설업자 등에게 뇌물과 성접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는 김학의(63) 전 법무부 차관은 구속됐다. 모르긴 해도 조사과정에서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이 구속사유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시민들이야 돌아가는 과정까지야 알 턱도 없고, 시시콜콜 알아봐야 별반 득 될 것도 없다. 그러나 판결을 선언하는 판사들만큼은 솔로몬의 지혜라도 빌려서 모두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과거 원님들이 송사를 다루었던 이야기 한토막이다.(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비단이나 담비가죽 같은 귀한 물건을 두고 서로 자기 소유임을 주장하는 두 사람 사이의 시비를 지혜롭게 해결한 원님의 명판결 이야기다. 예를 들어, 비단을 서로 잡아당겨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하자 한쪽은 좋아하고 한쪽은 울상을 짓는 것을 본 원님이 울상을 짓는 쪽이 진짜 주인이라고 판결을 내려 지혜롭게 시비를 해결한다.

요즘은 이런 명판결이 개그 형태로 변형되었지만 새겨둘만하다.

옛날에 고집쎈 사람과 나름 똑똑한 사람이 있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고집쎈 사람은 4X7=27 이라 주장하였고, 똑똑한 사람은 4X7=28이라 주장했다. 한참을 다투던 둘은 답답한 나머지 마을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 했다. 원님이 한심스런 표정으로 둘 을 쳐다본 뒤 고집쎈 사람에게 말을 했단다.“4×7=27이라 했느냐?” “네…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 이라고 우기지 뭡니까?”그러자 고을 원님은 다음과 같이 선고 했단다.“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을 열대 쳐라!”고집쎈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면서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았다. 곤장을 맞은 똑똑한 사람이 원님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원님의 대답은….“4×7=27이라고 말하는 아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 이니라,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진실이 무조건 최상의 답이 아님을 알고, 진실보다 더 귀한 답은 포용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진실을 잠시 묻어두고, 사랑과 관용으로 포용해주는 넉넉함이 세상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

중국 고사에 ‘타면자건(唾面自乾)’이란 말이 있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닦지 않고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른다는 말이다. 화가 나서 침을 뱉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닦으면 반감이라 생각하고 더 크게 화를 낼 것이니, 닦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당부다.

예수도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밀어라고 했다지만 이는 성인들이나 하는 행동이지 보통사람들은 실천하기 힘든 행동이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관용이란 말이 사라진지 오래다. 소위 정치 9단이란 사람도 발끈발끈해서 내 뱉는 말들이 참으로 경망스럽다.

<교통정보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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