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민의 [삶과 맥주]
움직이는 수제맥주(1)
오랫동안 나에게 맥주는 그저 맥주일 뿐이었다. 비틀거리며 흘러가던 대학시절 처음 맛본 맥주는 막연한 자유였고 털털한 위로였으나 시원하게 넘어가고 알딸딸하게 끝나는 것 이상을 거기에 기대해본 적은 없었다. 시절이 그랬고 내 주머니 사정이 그랬다. 고맙게도 맥주는 이제껏 그 자리를 나와 함께 지켜주었다.
대학시절에는 상상조차 되지 않던 마흔이라는 나이를 내가 먹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 후로도 나이를 더 먹는다는 사실이다. 거울 속의 모습이 변해간다. 결혼식들보다 장례식들에 더 자주 초대된다. 분명 적당하다고 여긴 자리에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참 뒤쳐져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여 다음 자리로 간다. 그런 걸음이 여러 장면에서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저 제자리에 있기 위해 열심히 달려야 하는 붉은 여왕처럼. 그러나 걱정하거나 조급해 할 것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이와 함께 겪은 경험들 덕분이겠지. 언제 어떻게 하든 성장은 성장이니까. 마흔 살 안에는 여전히 스무 살이 살고 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증거가 바로 맥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하루가 저물 무렵 꿀꺽꿀꺽 들이키는 맥주의 첫 모금에서 나는 종종 그 말을 실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신이 우리가 언제까지나 깔끔한 목넘김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맥주에 관한 나의 정체성을 거기에 소주를 어떤 비율로 섞는가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는 발견이 마흔이 넘은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조급하지 않은 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축복일까. 밤처럼 검은 빛에 일곱 가지 다른 맛이 차례로 혀를 두들기는 임페리얼 스타우트, 꽃과 과일의 향이 쌉쌀하고도 황홀하게 입안을 맴도는 황금빛 IPA, 자꾸만 손이 가는 잘 익은 김치 같은 사워에일, 이런 맥주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발걸음을 옮긴다.
맥주세계에 새로운 물결이 퍼져나가고 있다. 독점대기업의 밋밋한 오줌을 넘어, 먼 곳에서 실려 온 만원에 네 캔 대량생산 복제품을 넘어, 인간의 손으로 빚어져 마치 인생자체인 것처럼 달콤하면서 씁쓸하고 새콤하면서 향기로운 수제맥주 한 잔. 그것은 덕질도 사치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남아있지만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 당신에게 걸맞는 보상이다. 이 흥미로운 나라에서 독특한 인간들이 열정을 담아 맥주를 빚고, 눈 밝은 당신이 그것을 찾아 즐길 때, 어쩌면 그 맥주 한잔을 인간과 인간사이의 정직한 교감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편 맥주는 여전히 맥주다. 위스키나 와인이 깊이에 집착할 때 맥주는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집중해왔다. ‘아직 수제맥주는 잘 몰라서’ 하고 쑥스러워 할 필요도, 이런저런 정보를 달달 외워 상대에게 어필할 필요도 없다. 맥주의 본질은 편하게 즐기는 것이니까. 즐거움의 수단이 더 다양해졌을 뿐이니까.
가이드는 오직 당신의 솔직한 입맛, 가까운 수제맥주 전문점을 찾아 무턱대고 맛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보라. 친절한 직원, 열정적인 맥주집 사장에게 추천을 부탁하는 것도 좋겠다. 그래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영 모르겠다면 지금 핸드폰을 꺼내 ‘서울브루어리’를 검색해 보자. 최소한 그곳은 매일 밤 열려있다.
(‘삶과 맥주’ 연재는 다양한 국내 수제맥주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통해 맥주문화의 변화를 함께 느껴보는 자리로 언제나 퀼리티를 지향하는 ‘서울브루어리’(합정동, 070-7756-0915. 한남동, 070-8832-0915)와 ‘삶과 술’의 공동기획입니다.)

필자 장성민:▴1975년생 약사▴서울브루어리 부대표▴2016년 여행에세이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출간▴2017년 아무튼 시리즈 3권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출간▴현재 파주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며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북한을 여행할 예정(010-9645-6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