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 칼럼
조부를 위한 술심부름의 추억
박정근 교수
필자는 부모님 곁을 떠나 조부가 사시던 본가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지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부친께서 전북 부안읍내 가까이에 있는 본가로 보냈다. 동네에는 아직 적당한 학교가 없었고, 본가가 있던 마을이 학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의 거주이전은 꼭 요즘 학군을 찾으려는 실리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필자가 부안 박 씨 종손이라서 가문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조부의 교육을 받게 하여는 부친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조부께서는 풍류와 술을 즐기시는 한량에 가까운 분이셨다. 조혼을 한 할머니를 남겨두고 유랑극단을 이끌고 만주와 일본을 누비셨다고 한다. 필자가 만 여섯 살의 나이로 본가에 기거할 때 조부는 모든 일을 접으시고 주로 동네에 기거하셨다. 그는 읍내를 가끔 드나들며 크고 작은 사교 모임을 즐기시거나 동청에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창을 즐기시곤 했다. 조부께서 동청에서 노래하시면 마을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네 어른들 대부분이 농사를 짓거나 통상적인 생업에 종사하는 정도였으니 조부는 마을에서 단연 낭만적인 한량으로서 이미지가 두드러진 분이었다.
조부께서는 부친께서 변산에서 상업에 종사해서 벌어들인 자본으로 상당한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농사하고는 담을 쌓고 사셨다. 농사철에 아무리 바빠도 농사일을 거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양반은 항상 단아하게 다림질한 한복을 입으시고 읍내와 동네를 들락날락하시며 자신의 삶을 즐기시는데 몰두하셨다. 동네와 읍내를 연결하는 길들은 주로 논길이라서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질퍽거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우리 개구쟁이들의 바짓가랑이는 흙먼지가 떠날 날이 없었다. 하지만 두루마기를 입으신 조부께서는 지팡이를 들고 논길을 사이를 다니면서도 옷차림에 조금의 흩어짐이 없으셨다. 그분이 지나가시면 동네사람들은 약간 거리감을 느끼는 듯 했지만 어김없이 경외감을 표현하곤 했다.
밖에서 이름난 한량이라고 소문이 나셨던 조부이셨지만 집안에서는 좀처럼 소리를 높이지 않으셨다. 대신 식사 때마다 곁들이는 반주는 빼놓지 않으셨다. 작은 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살아서 어린 사촌동생들이 있었지만 조부의 크고 작은 심부름은 어김없이 필자의 몫이었다. 그만큼 필자에 대한 조부의 신뢰가 깊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심부름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조부의 큰 즐거움의 원천인 술을 꽤 떨어진 신작로 동네에 있던 점방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안전하게 나르는 일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막걸리가 넘실대는 주전자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마치 줄을 타는 광대의 걸음걸이와 엇비슷하였다. 막걸리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는 어린 초등학생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어쩌면 안쓰러운 이미지가 아닌가. 할아버지의 술을 안전하게 들고 가서 종손으로서 그분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는 소년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수 있을까. 벌써 그 시절 조부의 나이가 된 필자에게 지금도 조부와 종손의 정서적 유대가 어떠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이다.
사실 빈주전자를 들고 뛰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주전자를 들고 3㎞로 남짓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가기도 했다. 더더욱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씨가 궂은 날은 문제가 달랐다. 비바람이 치든 눈보라가 날리든 술심부름은 빼놓을 수 없었다. 왜냐면 날씨가 좋지 않을수록 읍내에 나가지 못하지는 조부께서는 적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셨던 것이다.
비바람이나 논보라가 쏟아지는 농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발을 안전하게 디딜만한 곳이 없어서 어린 필자는 눈물바람하기가 다반사였다. 찰랑거리는 막걸리를 흘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몸짓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평지에서도 가득 찬 주전자의 내용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미끈거리는 논길을 액체가 그득한 주전자를 들고 내용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체험을 거듭할수록 필자의 마음도 어린 소년에서 성인의 세계를 곁눈질하는 사춘기 소년으로 성숙했다고 본다.
필자는 악천후에 심부름을 하면서 주전자 뚜껑 사이로 흘러내리는 막걸리가 아까워 한 두 번씩 홀짝거리기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야 얼굴을 찡그리며 마시다가 추운 몸을 후끈 달구어 주는 술의 힘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다. 조부와 종손 사이에 주고받는 DNA가 어디 가겠는가. 성인이 되어 전성기 조부의 술 실력에 버금가게 된 것도 바로 술심부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밥상을 받고 반주로 막걸리를 걸쭉하게 들이키신 조부께서 빼놓지 않고 필자와 가족들에게 매우 의도적으로 던지는 말이 있었다. “우리 종손은 이 할애비를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술심부름을 빼놓지 않았어. 기특하지 않은고!” 요즘도 필자는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문득 조부님의 음성을 환청으로 듣곤 한다. 혹시 조부님의 영혼이 막걸리 잔을 타고 필자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술은 역시 인간의 마음을 풀어주어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명약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치면 독이 되지만 필자와 조부라는 두 세대의 간극마저 쉽게 풀어헤치는 술이야말로 디오니소스가 남겨준 최고의 창조물인 것이다.
필자 : 박정근 교수
▴고려대 영문학 박사▴대진대 영문과(대학원장 역임)▴17대 셰익스피어 학회 회장 역임▴윌더니스 문학 주간 ▴시인 ▴소설가